손경형 2017. 2. 27. 09:33

Ⅳ 안락사의 허용근거


 1. 안락사의 허용론

  1> 허용론의 근거

    안락사 옹호론자들은 엄격한 조건만 충족된다면 인간이 죽음을 선택하는것이 법적, 도덕적으로 허용될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적극적 안락사는 허용될수없다 하더라도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근거는 이러하다.


   1. 인공호흡기를 비롯한 생명 유지 장치에 의존해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말기 중환자들의 삶의 질은 형편없        이 낮다. 만약 인간 생명이 신성불가침하다는 원칙을 내세워 우리가 이들로부터 품위있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빼앗는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2.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시키는 것은 환자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의료진, 병원, 사회에도 부담을 주는          일이다.

   3.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2. 공리주의 입장

기본입장 - 인간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본질적으로 나쁜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으로 자살이나 안락사 행위가 욕구의 최대 만족과 최소 좌절을 가져올 경우 도덕적으로 옳은것이고 불치의 병을 앓고 있어서 서서히 죽어가는 고통과 치욕을 참느니 차라리 죽기를 원하는 경우나 이사람이 산다고 가족, 사회에 더이득이 없을 경우 공리주의자들은 안락사라고 판정한다.


3 온정적 간섭주의


 온정적 간섭주의 (paternalism)

  온정적 간섭주의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여 자식의 행복을 위해 좋은 것을 강요하듯이, 의료진은 환자의 의   사와 상관없이 환자의 선을 증진하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온정적 간섭주의에 대한 의견

 반온정적 간섭주의 (antipaternalism): 정당화될 수 없다.

 온정적간섭주의가 정당화될 수 있는 조건 (합리적 동의)

 약한 온정적간섭주의: 비자의적인 행동의 예방

 강한 온정적간섭주의: 합리적인 결정의 결과 피해가 큰 경우

        간섭을 통해 예방할 수 있는 피해나 제공할 수 있는 혜택이 자율성의 침해나 독립성의 손실을 능가해야 한다.

        . 간섭받는 자가 자율적인 선택능력을 상당히 제한받고 있어야 한다.

        . 행해지는 간섭이 이와 유사한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것이어야 한다.

        . 간섭받는 자가 후에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면 그러한 간섭에 스스로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의 예) 자살간섭: 자살 간섭은 의사의 선행의 의무인가?

 피해 회피 절차에 대한 요구사항의 무시 (수동적 온정적 간섭주의: passive paternalism)

        - 환자의 보호자가 알려달라고 하는 치료의 내용이나 절차가 환자의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알려주지 않는 것

        - 환자의 요구가 의료관행이나 의사의 양심과 상충할 때 치료를 거부하는 것

        - 의학상 효과없는 치료 (medical futility)를 하지 않는 것

 적극적인 안락사를 시키는 것은 선행의 원칙에 어긋나는가? 자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도덕적으로 잘못인가?   이러한 물음들은 인간의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 삶의 질을 고려한 생명을 염두에 둘 경우 쉽게 답하기 어렵다.

 온정적 간섭주의에 근거한 선행의 원칙은 무엇보다 자율성 존중의 원칙과 상충한다는 문제점을 지닌다. 그래   서 이 둘의 조화가 중요한 물음으로 부각된다. 선행의 원칙을 강조하면 개인의 자율성이 말살되기 때문이다.   이 둘을 조화시킬 기하학적인 규칙이나 기준은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으며, 심지어 그런 기준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Ⅴ 안락사에 반대하는 근거


1. 생명가치에 근거한 종교적 입장

 기독교적 가치관에서 안락사를 본다면 첫째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며 그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영역이며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는것이다.

 따라서 자살도 죄에 해당하므로, 아무리 환자의 요청이 있었다 하더라도 적극적 안락사는 환자의 입장에서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 행하는 자살인 셈이며 정당화 될수는 없다.

 둘째 기독교 윤리는 상황윤리나 공리주의와는 달라 선한 모적을 이루기 위해선 악한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즉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시킬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적극적 안락사의 경우 육제적 고통이 너무 심해 죽음이 유일한 해결인 것처럼 보이는 특별한 상황에서 환자에 대한 사랑의 동기가 된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의사의 행동 자체는 명백한 살인 행위인 셈이다.

 셋째로 안락사가 불치환자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먼저 고통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볼필요가있다.  고통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질때 본능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고 또 없애고자 노력하는 것들이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고통의 이면에 숨겨진 것들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각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애써야 한다. 거의 맹목적으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육체적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 지고선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믿음의 눈으로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초월적 삶의 자세가 요구되는것이다.

 넷째로 소극적 안락사의 경우에도 무제한 적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말하는것은 타당치 않다.

 그러나 도저히 소생가능성이 없는 사실상 식물상태의 환자에 대하여 막대한 비용이 더는 인위적 생명 유지장치를 사용하여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것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한다.

 다섯째로 우리사회에 만연돼 있는 인명 경시 풍조가 하루빨리 개선돼야한다.

 크리스천의 안락사에 대한 가치판단을 함에 있어서 세상의 시류에 휩쓸릴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세계관에 터잡아 진지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며, 고통과 죽음을 부정적으로만 볼것이 아니라 고통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부활과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지므로서 안락사의 유혹과 딜레마를 극복해야할것이다.


2. 의무론적입장

 생명권에 대해 죽음을 당하지 않을 권리, 즉 아무도 우리의 죽음을 유발할수 없다는 권리이다.

 자발적 안락사의 경우 자삵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자살이 도덕적으로 허용될수 있다면, 내목숨을 나자신이 아닌 다른사람이 끊어준다고 달라질것은 없다는 입장이다.

 법적으로는 자발적 안락사는 합법화 해서는안된다. 진정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사기인지 알수없기 때문이다. 비자발적 안락사의 경우 이는 죽음을 당하지 않을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그가 의사표현할 능력만 있다면 생명권을 스스로 기꺼이 포기하리라는 아주 강한 신념을 느낀다면 자살이나 안락사가 허용된다면 능동 수동의 구분은 무의미 해진다. 그러나 비자발적 안ㄹ가사의 경우는 능동적 안락사는 허용안되지만 수동적 안락사는 허용될수있다.  의무론에서는 경우에 따라 능동과 수동의 구분이 중요할경우가 있다.


3. 호스피스 제도

호스피스의 사전적 의미는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연명의술(延命醫術) 대신 평안한 임종을 맞도록 위안과 안락을 최대한 베푸는 봉사활동으로서 호스피스의 정신은 인간 삶의 질을 존중한다. 하지만 안락사와 달리 환자의 죽음을 결코 의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호스피스는 말기환자가 품위를 유지한채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할때까지 단지 소극적인 치료만 제공한다.

  안락간호원(安樂看護院)이라고도 하듯이, 이러한 봉사를 전문적으로 하는 병원을 뜻하기도 한다. 호스피스는 1815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채리티수녀원의 수녀들이 거리에서 죽어 가는 가난한 환자들을 수녀원으로 데려다가, 임종준비를 시킨 데서 유래한다. 그 뒤 1967년 영국 런던 교외에 세운 성(聖)크리스토퍼 호스피스가 시초가 되어, 세계적으로 보급되었는데, 현재 영국에서는 약 200개, 미국에 약 1,200개가 넘는 호스피스가 있다.

 한국에서는 강릉의 갈바니병원에서 1978년 6월에 호스피스 활동을 시작한 것이 최초이다. 1982년 4월 서울의 강남성모병원을 중심으로 본격화되어, 대부분의 가톨릭계 병원에서 실시하고 있다. 특히 1995년에는 국내 최초로 가톨릭대학교 간호대학이 세계보건기구(WHO) 호스피스 협력센터로 지정되었다.

 호스피스는, 죽음이란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완화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므로, 암 환자의 치료에도 의학적 견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즉 호스피스는 모든환자를 거의 본능적으로 살려내고자 하는 일반병원과는 달리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 할것인가 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Ⅵ. 안락사의 각국의 입장과 주요 사건


1. 안락사에 관한 각국의 입법

① 미국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안락사에 관한 많은 논쟁이 있어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미국은 주 (州) 마다 차이가 있지만 40개주가 환자가족의 동의 등 엄격한 요건 아래 생명보조장치를 제거하는 수준의 소극적 안락사(존엄사) 행위는 대체로 인정하나 적극적 안락사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1988년 및 1992년 안락사법제화를 위한 주민투표가 시행되었으나 부결되었다.

 워싱턴 주에서는 1991년 '죽을 때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법안을 주민투표에 붙였으나 부결되었다.


 미 오리건주는 주민투표를 거쳐 말기환자가 의사에게 극약을 처방받아 스스로 복용해 자살할 수 있게 하는 존엄사(尊嚴死)법을 주민투표를 거쳐 97년 10월부터 시행해왔고 1998년에만 15명의 말기환자들이 이 법을 통해 합법적으로 극약을 삼키고 고통을 마감했다. 이에 대해 미 의회 공화당 의원들이 제동을 걸고 나서 미 연방 하원은 1999년 10월 27일 '인간생명에 대한 존중' 을 표방하며 극약을 자살용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금지해 존엄사법을 무력화시키는 '고통경감법'안을 통과시켰다.

   극약을 자살용으로 처방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위 법안이 미 하원을 통과한 다음날인 지난 10월 28일 오리건주 주민들은 포틀랜드에 모여, 하원의 행동은 주의회가 확정해 합법화한 '존엄사법' 을 무시하는 횡포라고 시위를 벌였다.


2 영국

 19세기 말부터 안락사에 대한 논쟁을 벌였고, 안락사를 합법화하려는 입법제안이 몇차례 있었으나 지금도 법률로는 안락사가 허용되지 않고 있다.

 다만 제한적으로 존엄사를 인정하는(예컨대 3년 이상 식물인간상태로 있던 자에게 영양공급장치를 제거해도 좋다는 1993년 판결) 판결이 선고되고 있어 소극적 의미의 안락사는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


3 호주

      호주는 96년 안락사를 법제화했다가 6개월만에 폐기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호주연방 8개주 가운데 3개주가 생명연장장치를 제거하는 의료행위를 법으로 허용하    고 있고 나머지 주들도 관습법상 이를 인정하고 있다.


4 프랑스

 뇌사상태라도 심장박동이 완전히 멎지 않는 한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엄격한 나라다.    동물을 인위적으로 죽이는 행위도 형사처벌 대상이다.

 그러나 최근 프랑스에서도 안락사에 대하여 제한적으로 허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고 프랑스 정부는 2000년 9월 말기 환자들이 편안하게 삶을 마감할 권리를 인정키로 하고 구체적 조치를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5 독일

 "어떠한 이유라도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고 형법에 규정하고 있으며, 고의가 인정될 경우 최고 종신형까지 처벌받는다.


6 일본

 95년 요코하마 (橫濱) 법원의 판례에 따라▶환자의 참기 힘든 고통▶죽음의 임박성▶본인의 의사▶고통제거수단의 유무 등의 기준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하고 있다.


7 네덜란드 안락사 허용

네덜란드는 판례를 통하여 엄격한 요건하에 존엄사나 안락사를 허용해왔기에 안락사에 관하여 가장 관용적인 나라로 알려져왔다.

 그리고, 2000.11월 네덜란드 하원은 세계 최초로 불치병 환자의 안락사를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네덜란드 법안은 안락사 허용을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 즉, 대상자가 불치의 환자여야 하고 고통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하며 환자가  이성적인 판단으로 안락사에 동의해야 의사가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네덜란드에는 1996년 이후 위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2천565건의 안락사가 있었던 것으로 공식 집계되고 있으며 안락사의 90%는 말기 암 환자를 대상으로 실시됐다. 위 법안의 통과는 그동안 네덜란드에서 관례상 묵인돼온 안락사를 사실상 합법화한 것이다.


8 우리나라

 우리나라도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생명을 단축시키는 행위는 형법상 촉탁살인죄나 자살방조죄가 성립한다.

 그러나 소생가능성이 없는 식물상태의 환자에 대하여 인위적인 생명연장장치를 제거하는 것과 같은 존엄사의 경우에는 실제로 병원등에서 암묵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실정이고, 이를 실정법으로 처벌하는 경우도 드문 것이 현실이다.


2. 안락사가 문제된 주요 사건

(1) 퀸란 사건

      이른바 [존엄사] 또는 [환자의 죽을 권리]와 관련된 논란은 지속적 식물상태 환자를 계기로 일어났다.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1975년 미국 뉴저지주에서 일어난 퀸란 사건이 발단이었다.

      퀸란(Karen Ann Quinlan)은 21살된 여자로 1975년 4월에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술과 약물에 중독되어 호흡정지가 있은   다음에 혼수상태에 빠졌고, 병원에서 인공호흡기를 장착하여 지속적 식물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퀸란의 아버지는 의사로부터 의식이 회복할 가능성이 없고 인공호흡기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설명을  듣고, 퀸란에게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기회를 주겠다고 결심하여 의사에게 생명유지장치를 떼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의사가 이를 거부하자, 퀸란의 후견인으로서   생명유지장치를 뗄 권한을 자기에게 달라는 소송을 법원에 냈다.

      뉴저지 고등법원(1975. 11. 10 판결)은 생명유지장치를 뗄지 여부는 어디까지나 의료적인 문제이므로 주치의의 결정에 맡겨야   한다고 하여 퀸란의 아버지가 낸 신청을 기각하으나 주 대법원은 1976년 3월 31일에 아버지의 주장을 인정하여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① 후견인과 가족이 같은 의견이고, ② 다른 의사가 퀸란은 현재 혼수상태에서 인식있는 지적 상태로 회복할 가능성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생명유지장치를 정지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③ 입원한 병원의 윤리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장치를 제거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 판결은 자기결정권(自己決定權)을 존중하여 「개인적 권리(privacy)」를 긍정한 새로운 판결로서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법원의 판단에 따라 생명유지장치는 떼었지만 퀸란은 당초 예상과는 달리 스스로 호흡을 회복하여 지속적 식물상태 환자로 9년 남짓 생존하다가, 1985년  6월 11일에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2) 케보키언 사건

      '죽음의 의사'로 불리운 미국의 케보키언이 박사는 1998년 9월 미시간주에서 루게릭병을 앓고 있던 유크에게 치사량의 독극물을 주입, 사망케 한 뒤 이 장면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미 CBS 방송의 '60분' 프로그램을 통해 방영했다가 2급 살인죄로 최소 10년 최대2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안락사 옹호자인 70세의 케보키언은 지금까지 매년 10여명씩 불치병 환자 1백여명의 자살을 도와주면서 '자살장치' 를 만들어 환자 스스로가 마지막 스위치를 누르게 하여 그동안 자살방조죄로 네 번이나 기소되고도 풀려났었는데, 이번에는 직접 의사 자신이 주사를 놓아 사망하게 하고, 그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 CNN에 방영시키며 "나를 잡아넣으려면 잡아넣어라" 고 사법기관에 공개도전을 했다가 살인죄로 중형을 선고 받았다.


국민일보 2005-08-10 18:21] 


종교적 신념이나 믿음을 떠나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보고 적극적인 태도로 맞는 이들에게 죽음은 소망이다. 그러나 소극적이거나 혹은 거부하는 모습으로 맞는다면 절망이자 고통이다. 인간의 마음대로 안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죽음이지만 사람들은 안락하고 편안한 죽음을 갈구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노인들은 병원에 있다가도 죽기 전에 집으로 옮기길 원했다. 병원에서의 죽음은 객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품위 있는 죽음’을 원했기 때문이다.


미국 국립의료연구소(NIH) 연구원이던 수전 토러스(26)는 최근 뇌사상태에서 생명보조장치를 이용해 임신 27주 만에 제왕절개 수술로 0.82kg의 아이를 분만했다. 그녀는 아기를 분만한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남편 제이슨은 아내도 아이를 낳기를 원했을 것이라며 수전의 생명연장을 결정했었다.


미국인 테리 샤이보(41)씨는 1990년 심장발작 후 식물인간이 되어 15년간 의식불명상태에서 급식튜브로 생명을 연장해 왔다. 남편 마이클 샤이보씨는 지난 3월 “인간은 존엄성을 지키며 깨끗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며 아내의 급식튜브를 제거하려 했다. 반면에 테리 부모들은 이같은 행위는 헌법에 보장된 생존권의 침해라며 급식을 계속해야 한다고 맞섰다. 전 미국이 거센 안락사 논쟁에 휩싸인 가운데 법원은 남편의 손을 들어주었고 테리는 결국 급식튜브가 제거된 지 13일 만에 사망했다.


테리가 사망한 2달 뒤 의료진은 그녀의 부검결과를 발표했다. 테리의 뇌세포는 15년 동안에 상당히 죽어 정상인의 반 정도밖에 안되었으며 이미 시력은 상실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적적으로 깨어난다 해도 정상생활은 100% 불가능했다. 이 상태에서 남편 마이클은 테리에게 급식튜브를 통해 계속 음식을 공급해야 옳은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 문제를 둘러싼 안락사 찬성론자들과 반대론자들간의 논쟁은 여전히 격렬하다. 사람들은 이쯤에 이르면 솔직히 안락사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피를 나눈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이 불치의 병으로 시한부 생명을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아픔이다. 더욱이 극도의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면 더욱 힘든 일이다. 그래서 환자 자신이나 그 고통의 시간을 지켜보는 이들은 사랑하는 이가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갈망하고 피하려는 생각을 한다. 즉 안락사라는 고통 회피 방법이다.


안락사란 ‘질병을 앓고 있거나 자연적 수명이 다해 어떤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도 다시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생명을 단축시켜 인위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말하는 안락사는 어떻게 포장을 해도 ‘평안한 죽음’이 아닌 ‘안락살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죽음의 때를 선택할 권리와 권한이 없다. 그것은 창조주의 고유영역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누구도 죽음이라는 자연적 현상에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은 본래 죽게 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죽어야 하며 품위를 갖춘 죽음이란 어떤 것이냐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더욱 극심한 고통으로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마저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죽음을 어떻게 맞아야 할까?


생명윤리 문제를 다루는 성직자와 학자들은 “비록 극심한 고통이 있더라도 환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자신의 실존적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면서 온전한 자유와 책임감을 함께 갖춘 온전한 의식으로 죽음을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현대의학의 완화의료기술은 극심한 통증을 조절,인간적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