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데리다
생활 속의 철학
자크 데리다
해체주의란 무엇인가?
[Jacques Derrida ]
출생 - 사망 | 1930.7.15. ~ 2004.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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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해체주의를 대표하는 작품 [그라마톨로지(문자론)](1967, 김성도 옮김)는 루소와 루소를 자신의 인류학적 연구에 영감을 불어넣는 스승으로 여긴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비판적 연구이다. 왜 독창적인 철학서가 다른 사상가에 대한 연구서의 성격을 지니냐고? 서구의 사고방식을 가능하게 한 숨겨진 조건으로써 ‘문자’를 탐구하는 것이 데리다의 작업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서구 사상을 대표하는 구체적인 작품들에 밀착하는 연구가 될 수밖에 없다. 루소는 바랑 부인을 애인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고백록]의 다음 구절은 그가 얼마나 그녀에게 집착했는지 알려준다. “언젠가는 식탁에서 그녀가 입에 빵 조각을 넣을 때 나는 머리카락을 보았다고 소리쳤다. 그녀는 곧 그것을 접시에 뱉어 내었고, 나는 그것을 게걸스럽게 손에 쥐고 삼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상당히 비위 상하는 취향을 가지고 자신의 강렬한 애욕을 표현했던 루소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녀를 보지 못할 때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녀에게 애착심을 가졌다.” 여자가 직접 눈앞에 ‘현전(présence)’할 때가 아니라, 보지 못할 때 애욕을 가진다니? 헤겔이 말하듯 현전의 두 조건인 ‘지금’과 ‘여기’는 서구의 정신세계에서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 없을 때, ‘직접’ 만나지 못할 때 애정이 우러난다. 그러니 대상의 비밀은 현전하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대상의 살아 숨 쉬는 ‘직접적 목소리’ 대신 목소리의 흔적내지 무덤 같은 ‘문자’에 말이다.

바랑 부인과 루소의 이상한 연애에 대한 분석은 조금 뒤로 미루자. 데리다가 저 루소의 예를 통해 보이고자 하는 것은 ‘직접적 목소리’ 대신, 목소리의 이차적 표현이라 생각되어온 ‘문자’가 오히려 근본적이라는 것이다. [그리마톨로지]와 같은 해에 출간된 [목소리와 현상] 및 논문집 [글쓰기와 차이] 역시 후설, 프로이트 등의 텍스트를 분석하여 서구적 사유 안에 은폐된 채 작동하는 문자의 논리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고, 담고 있는 ‘정치적 비판의 힘’은 어떤 것인가?

문자 가운데는 음성 언어를 가장 잘 구현한 표음 문자가 다른 문자 보다 우월하다는 것에 표음문자, 즉 알파벳을 사용하는 서구의 민족중심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출처 : NGD>
루소는 문자 언어에 대한 음성언어의 우위성에 대해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군집해 있는 대중에게 들리지 않는 언어는 모두 노예의 언어라고 말하고 싶다.” 이 말은, 음성의 직접적 사정권 안에서 언어가 음성을 타고 전달되는 것이 이상적이며, 이 사정권을 넘어 문자 같은 것이 의존하는 언어는 부정적이라는 점을 함축한다. 문자에 대한 루소의 이런 불신을 레비스트로스는 다음과 같이 더 급진적으로 이어 받는다. “문자 언어 자체는 그 기원부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에 토대를 둔 사회와 끊임없이 관계 맺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서구 사상은 목소리의 직접성을 선호하고 문자의 간접성을 악마적인 것으로 여긴다. 왜 그런가? 이는 로고스라는 그리스 말의 의미만 살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로고스의 뜻은 ‘이성’이기도 하고 ‘목소리’이기도 하다. 이성의 사유는 목소리 안에서 충만하게 구현된다. 반면 문자는 이 로고스와 이질적인 것이며, 따라서 로고스 ‘바깥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고스가 문자에 의존하면, 이는 로고스 바깥에 있는 문자의 침입에 의해 로고스의 내면이 오염되는 것을 뜻한다. 문자의 등장은 “음성 언어(로고스)의 활동에 손상을 끼치면서 ‘바깥쪽이 안쪽으로’ 난입하는 것이다.”
따라서 음성 언어가 가장 ‘순수하다.’ 또한 문자 가운데는 음성 언어를 가장 잘 구현한 표음 문자가 다른 문자 보다 우월하다. 음성 보다 시각에 호소하는 상형 문자는 가장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에 바로 표음문자, 즉 알파벳을 사용하는 서구의 민족중심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문자 언어가 음성 언어와 맺는 관계는 중국과 유럽이 맺는 관계와 동일하다.” 데리다는 서양 철학 곳곳에서 음성중심주의를 확인함으로써 서구의 민족중심주의를 폭로하려는 것이다.

서구의 민족중심주의를 감추고 있는 대표적 예가 바로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이다. [철학의 숲]의 ‘레비스트로스’ 편에서 본 것처럼 그는 서구적 이성의 특권에 맞서서, 인류의 삶을 보편적으로 지탱하는, 서구적 이성 이전적인 ‘구조’를 밝힌 사람이다. 또한 그는 야생적 세계에 대한 서구인의 침략을 분노와 슬픔과 더불어 기록한 사람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데리다는 이런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표적으로 택했을까?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서구 사상의 장, 특히 프랑스에서 지배적인 담론(그것을 ‘구조주의’라고 부르자)은 오늘날 너무 성급히 자신이 뛰어넘었다고 주장하는 형이상학(로고스중심주의)에서 그 성층화의 한 단층에 의해, 때로 가장 풍성한 형이상학의 단층에 의해 사로잡혀 있다.”
서구 형이상학이 지닌 로고스중심주의, 순수한 목소리내지 유럽적 표음문자 중심주의가 암암리에 구조주의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레비스트로스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에서 자신이 연구한 브라질의 남비콰라 족이 지닌 야생의 순수함에서 “인간적 애정의 가장 감동적이고 가장 진실한 표현 같은 무엇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순수한 사회를 망쳐놓은 것이 문자라는 것이다. “문자와 배신이 한꺼번에 자기네 사회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어떻게 문자에 대한 이런 비판을 하게 됐을까? 레비스트로스는 남비콰라 족이 애초에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날 원주민 사회에 들어선 이 유럽인 인류학자가 종이와 연필을 나누어 주자 그들은 바로 유럽인을 흉내 내 종이에 글씨 쓰는 시늉을 했다. 영리한 추장은 문자의 기능을 간파했다. “문자에 대한 추장의 태도는 시사하는 바 크다. 그는 곧 문자의 기호 역할과 그것이 부여하는 사회적 우월성을 이해했다.” 문자를 통해, 위계가, 바로 불평등이 순수한 사회에 침투한 것이다. 그리고 이 문자란 야생인들의 삶에 속했던 것이 아니라, 유럽인이 옮기는 전염병처럼 외부로부터 인위적으로 침입한 것이다. “그것은 차용, 그것도 그릇된 차용이다.”

어느 날 원주민 사회에 들어선 유럽인 인류학자가 종이와 연필을 나누어 주자 그들은 바로 유럽인을 흉내 내 종이에 글씨 쓰는 시늉을 했다.
<출처 : NGD>
이렇게 문자의 침입과 더불어서 순수한 야생적 사회는 불평등 속에서 오염된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인류학]에서 말한다. “문자는 인간에게 많은 복리를 가져다 주는 동시에 본질적인 것을 앗아 간다.” 레비스트로스는 문자를 인위적인 악의 일종, 야생사회를 오염시키는 서구의 문명의 전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과 야생적 사회에 대한 긍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심층에는 서구적인 ‘순수성의 신화’가 자리 잡고 있으며, 바로 이것이 데리다의 비판이 가 닿는 지점이다. 야생사회는 타락한 문명(문자) 이전의 순수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서구가 이를 오염시켰다. 이런 주장은 사실 순수한 낙원이 ‘기원적으로’ 있고, 인류 역사는 그로부터 추방당한 역사라는 유럽의 신화(성서)를 야생인에게 투영한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순수성에 대한 이 신화는 근본적으로는 순수한 것과 오염된 것을 위계적으로 가르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순수성에 대한 이런 선호는 서구 역사의 최악의 시기에는 피의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인종주의로 표현되기도 했지 않은가? 한 마디로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은,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평등주의와 양심 배후에, 순수한 기원을 배타적으로 유지하려는 서구적 사고방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보자. 남비콰라 족은 정말 애초에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남비콰라족의 말 가운데, 이에카리우케듀투(iekariukedjutu)가 있다. 기록하는 행위, 글을 쓰는 행위를 이 단어로 지칭했다. 이것을 레비스트로스는 평가 절하해서 ‘선을 긋는 것’이라 번역했다. 이는 한 민족이 가진 글을 쓴다는 의미를 빈약하게 번역해서 그들에게서 글을 빼앗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요컨대 레비스트로스가 가진 서구인의 순수성의 신화가 남비콰라 족에게서 글을 빼앗고, 그들을 최초의 문맹자인 아담과 이브처럼 만들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모든 민족은 애초에 문자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

이렇게 문자라는 오염 이전의 순수한 삶, 자신의 마음과 정확히 동일한 목소리만 가지고 사는 사회는 없고, 문자는 모든 삶의 방식에 애초부터 침입해 있다는 것이 데리다의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순수한 기원’과 그로부터 ‘타락한 문명’이라는 위계적 질서를 비판에 붙인다. 이런 위계적 질서의 와해는 ‘순수함과 타락’이란 잣대로 이런저런 문명을 저울질해서 불평등의 위계를 세우는 일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힘을 지닌다.
데리다는 그의 사상의 핵심에 위치하는 이 ‘문자’를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한다. 문자(gramme), 에크리튀르(글, écriture), 원(原)-에크리튀르(archi-écriture), 흔적(trace), 원-흔적(archi-trace) 등등. 이렇게 용어가 다양하다고 복잡해 할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여러 명칭으로 불리는 이 문자의 통일적인 작용 방식인데, 그것이 바로 ‘대리보충(supplément)’의 논리, 또는 ‘사후성(事後性, nachträglichkeit)’의 논리라는 것이다. 기원(원본)이란 흔적(문자)에 의해서 대리되고 보충되는 ‘이차적 첨가물’이라는 것이 이 논리의 기본을 이룬다. 흔적이라는 대리자를 통해서만 기원은 도래하므로, 기원의 현시는 흔적에 의해 방해 받는 셈이다. 달리 쓰자면 흔적이라는 대리자 뒤로 기원의 도래는 무한히 ‘연기되어(différé)’ 있는 것이다. 이렇게 흔적 뒤에서 도래한 것이니 기원은 사실상 기원의 자격조차 가지지 못하게 된다. 다시 우리가 처음에 끄집어냈던 루소의 삶으로 돌아가 이점을 살펴보자. 의미심장하게도 바랑 부인을 보지 못할 때, 즉 ‘원본이 부재할 때’ 더 애착이 생긴다는 루소의 삶 자체가 온통 원본을 대리하고 보충하는 놀이로 가득하다. 그는 [고백록]에서 바랑 부인의 집에서 살던 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쓴다.
“밤이 되면 그녀의 모습을 상기시키는 물건들에 휩싸이고 그녀가 잤던 침대에서 잠을 잤다. 얼마나 많은 자극제들인가! 이런 모습들을 그려보는 독자는 벌써부터 나를 반은 죽은 놈처럼 쳐다본다. 그러나 정반대이다. 나를 파멸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최소한 한때 나를 구원해 준 것이다.”

루소의 연인이었던 바랑 부인
<출처 : wikipedia>
루소는 바랑 부인이 지금 여기 있는 것, 곧 그녀의 현전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그녀가 쓰던 침대 같은 물건들(그녀의 흔적)이 그녀를 대리하고 보충하는데 관심이 가 있다. 오로지 이 대리하고 보충해 주는 흔적들을 통해서만 루소는, 그 물건들의 배후로 끈임 없이 도래가 ‘연기된’ 자로서만 바랑 부인을 만나는 것이다. 바랑부인이 지금 여기 현전하지 않고 연기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랑부인은 그녀를 대리 보충하는 흔적과 ‘간격’ 내지 ‘차이’를 지닌 것으로서만 도래한다는 것이다. 즉 ‘연기(différer)’와 ‘차이(différence)’, 곧 이 둘의 의미 모두를 지니는 ‘차연(差延, différance)’이 대리보충 논리의 정체이다. (“차연의 다른 이름인 대리 보충.” ‘차이’의 중간 철자 E를 A로 바꾼 차연은 차이와 연기 양자를 한꺼번에 뜻하는 데리다의 신조어이다. 피라미드를 닮은 A는 생생한 현전을 방해하는 문자의 죽음, ‘무덤’을 생각나게 한다고 데리다는 말한다. 또한 철자(문자)가 바뀌었어도 différence와 différance는 모두 ‘디페랑스’로 동일하게 발음되는데, 이것은 음성 언어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문자의 차원에서만 의미는 변별적으로 된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런 ‘차이남’과 ‘연기됨’이 바랑 부인이 루소에게 도래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즉 흔적의 대리보충에 의해 현전이 실패하는 방식이 루소가 그녀와 관계하는 유일무이한 길이다. 이렇게 흔적은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원본(기원)의 도래를 연기하며, 바로 그 연기됨의 방식으로만 원본이 출현하게 만든다.
잠깐 지나가면서 말하면, 필자의 생각엔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역시 대리보충의 좋은 예를 보여준다. 목동(흔적)은 ‘고도’가 곧 도래한다고 알리지만, 고도는 극이 끝날 때까지 현전하지 않는다. 오로지 목동의 고지(흔적)에 의해 도래가 무한히 연기되는 방식이 원본(고도)이 출현하는 방식인 것이다.

루소가 바랑 부인과 함께 살았던 집 <출처: Chris Bertram at en.wikipedia.org>
루소는 매우 다양하게 이런 대리보충에 의존한다. 루소의 또 다른 애인 테레즈를 보자. 그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테레즈에게서 필요로 하는 대리 보충을 찾았다.” 테레즈는 무엇을 대리 보충하는가? 바로 플라톤이라면 이데아라고 불렀을 이상적 연인인 ‘어머니’를 대리 보충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엄마의 계승자가 필요했다.” 그런데 진상을 말하자면 어머니는 애초에 현전하지 않으며, 이 현전하지 않는 어머니를 도래하게 하기 위해서 테레즈의 대리보충은 의미 있는 것이 된다. 기원(가령 이상적인 어머니)이 있고, 그 기원을 모사하는 흔적(가령 테레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원은 흔적의 대리와 보충을 통해 뒤늦게 첨가되는 기원, ‘사후적으로’ 도래하는 기원일 뿐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차적으로 첨부되는’ 기원이 기원이란 말뜻에 합당하기나 한가? 따라서 이는 결국 기원은 부재한다는 것이며, 기원의 진실은 비기원인 셈이다. “차연이 근원적이라고 말하는 것, 그것은 동시에 현재적 기원의 신화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말소를 위해 그은 선 아래로’ ‘근원적’이라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루소 자신은 늘 현전, 순수한 것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순수함을 오염시키며 끼어드는 문자(대리보충을 수행하는 흔적)는 하나의 병으로서 혐오했다. “루소는 문자 언어를 현전의 파괴이며 음성 언어를 병들게 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또 직접적으로 그는 대리보충을 비난하기도 했다. “위험한 대리 보충. 이 말은 루소 자신이 [고백록]에서 사용한 말이다.” 그런데 이런 혐오가 무색하게도, 앞서의 사례들이 알려주듯 현전하는 기원이란 기원을 직접 표현하는 음성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흔적의 대리보충에 의해 이차적으로 첨가되는 것이다. 따라서 순수한 기원은 없고 흔적(문자 또는 텍스트)의 기능만 있다. 이것이 바로 “‘텍스트를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이란 없다(Il n'y a pas de hors-texts).’”는 유명한 말의 뜻이다. 근원을 첨가해주는 문자 자체의 놀이만이 있을 뿐 문자를 벗어난 기원 그 자체는 없다는 것이다.
서구적 사유는 문자의 이 대리보충을 망각한 채 기원이 순수하게 ‘직접적으로’ 현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레비스트로스는 남비콰라 족에게는 그들의 자연적 삶이 그들의 음성 언어 속에서 현전한다고 믿었고, 루소는 기원적 어머니상이 애인들을 통해 현전한다고 믿었다. 즉 서구적 이성의 사유의 ‘울타리(clôture)’ 안에선 대리보충이 생각될 수가 없는 것이다. “대리 보충적 가능성을 이성은 사유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문자의 대리보충은 서구적 사유 ‘바깥에서’ 작동한다. 즉 대리보충은 서구적 이성이 기원의 현전을 사유할 수 있도록 해주지만, 그 사유 자체 안에는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대리보충의 논리를 보이는 일은, 서구적 사유가 그 자신 안에 자신의 존립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폭로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해체’라 불린다. 그러나 이 해체는 또한 서구적 사유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을 탐색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서구적 사유의 숨은 ‘근거’를 탐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현전은 약속되는 동시에 거부된다.” 이 모순적인 국면이 해체의 특성이다. 즉 해체는 양날의 검으로써, 한 편으로 서구적 사유 자체 안에 그 사유의 근거가 없음을 보임으로써 그것을 와해하고, 다른 한편으로 서구적 사유 바깥에서 그 사유를 지탱해주는 것을 찾음으로써 서구적 사유의 조건을 마련한다. 그런데 서구적 사유 바깥에서 작동하는 이 문자는 기원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일까? “문자 언어에 의한 변질은 기원적인 외재성이다.” 여기서 ‘기원적’이란 표현이 알려주듯 문자는 일종의 기원이다. 그러나 다음 문장을 보자. “‘흔적은 실재로 의미 일반의 절대적 기원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의미 일반의 절대적 기원이 없음을 뜻한다.’” 그것은 기원이되 서구적 사유 ‘안에서’ 의미의 원천을 이루는 기원은 아니다. 이런 뜻에서 문자는 서구적 사유의 울타리 안에 있지 않은 기원, 비기원적 기원이다.
이런 해체 작업이 지닌 비판적 힘은 명확하다. 삶에는 순수한 기원과 그로부터 타락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낙원의 신화를 지닌 서구인들은 그렇게 이해했다. 그들은 생각과 삶과 그것의 자연적 표현으로서 목소리가 일치하는 세계에, 문자와 같은 이질적인 것이 침투한 불행한 순간을 상상했다. 이런 문자의 침투와 더불어 서구의 두 학문인 인식론과 역사학이 발생한다. 이 두 가지는 동일한 임무를 띠는데, 타락한 현재로부터 순수한 기원을 회복하는 것이다. “역사와 지식, 이스토리아와 에피스테메는 언제나 (기원의) 현전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우회로 규정되었다.” 인식은 기원적 진리에 도달하는 방식으로, 역사학은 다시 기원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그러므로 기원의 상실에서 생긴 이 두 학문은 ‘목적론적 시간’을 만들어 낸다. 타락으로부터 방황한 끝에 원래의 기원을 최종 목적의 자리에서 되찾고 만다는 서구의 신화가 이 목적론적 시간을 중심에 두고 짜인다. 이 와중에 저 목적을 향한 진행의 관점에서 바라보기에, 순수함을 오염시키는 여러 삶의 퇴행적 형태가 비판된다. 그 퇴행적 삶은 때로는 역사적 발전 단계가 없는 동양의 모습이었고, 또 서구 역사의 어두운 국면들에선 인종주의의 희생물로 바쳐진 ‘오염된 피’였다. 데리다의 문자론은 바로 이런 서구의 신화를 비판의 표적으로 삼는다. 문자론 이후 데리다는 [다른 곶](1991), [마르크스의 유령들](1993), [법의 힘](1994), [환대에 대하여](1997) 등 많은 저작을 통해, 법과 정치를 비롯한 여러 영역에서 ‘타인에 대한 환대’ 등과 같은 주제를 자신의 학문 과제로 발전시키면서, 구체적인 맥락들에서 서구의 질병을 치료하려고 했다.
발행일
- 2011. 04. 04.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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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 벨기에 루뱅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으며 [익명의 밤], [일상의 모험―태어나 먹고 자고 말하고 연애하며, 죽는 것들의 구원], [들뢰즈의 철학―사상과 그 원천], [차이와 타자―현대 철학과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 등의 저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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