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료/♣스크랩자료

서울 뚝섬 벼룩시장

손경형 2011. 5. 10. 17:18

천원 한 장에도 벌벌… 반찬값·생활비 벌려고 40년 간직한 추억도 판다. 최보윤 기자 오윤희 기자  

서울 뚝섬 벼룩시장에서 본 '2011 대한민국 서민 풍경'
외항선 타던 남편이 사다준 라디오, 결혼기념일 선물로 받은 한복 노리개…
갖가지 물건마다 '그들만의 사연' 담겨

"제발 1000원에 해 주세요. 우리 애 옷 좀 입히고 싶어서요. 같은 엄마끼리 좀 봐주시면 안 돼요?" 두 살짜리 아들을 포대기로 들쳐멘 조모(34)씨가 애원 조로 말했다. 좌판을 편 판매상은 "2000원은 받아야 한다"고 손사래를 치다가 조씨의 애원에 결국 물건을 내줬다. 허리춤에서 꼬깃꼬깃한 천원짜리를 건넨 조씨는 "우리한텐 1000원 차이도 크다"고 말했다.

지난 7일 서울 광진구 자양동 뚝섬에서 열린 '뚝섬 아름다운 나눔 장터(일명 뚝섬 벼룩시장)'는 '1000원의 전쟁터'였다. 집에 있던 옷가지나 가재도구를 1000원, 2000원이라도 받고 팔려는 사람들과, 남이 쓰던 물건이라도 조금이라도 싸게 구입하려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밥그릇·은수저·25년 전 노리개까지 나와

뚝섬 유원 지역 2,3번 출구 앞 공터를 꽉 메운 뚝섬 벼룩시장. 오전 11시 반쯤부터 여행용 트렁크, 천 보따리, 각종 박스를 든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챙 있는 모자를 쓴 50~60대 여성들이 60~70%를 차지했고, 어린 자녀를 데리고 나온 30대 주부와 40~50대 남성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시장 입구 안내판엔 '화장품이나 먹을거리, 새 상품은 판매할 수 없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들이 가져나온 물건들은 대부분 '집에서 쓰던 물건들'이다.

뚝섬 벼룩시장엔 수저·밥솥·냄비 같은 각종 가재도구는 물론 콘센트·구형 라디오·대걸레 같은 잡동사니들도 나와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3000원 이하가 대부분으로, 판매금액의 10%는 기부금으로 내놓는다. /최보윤 기자
물건을 팔러 나온 사람들은 입구에서 번호표를 받은 뒤 그 번호가 적힌 장소에 돗자리를 펴고 가져나온 물건을 펼쳐 놓았다. 한 사람당 2.31㎡(약 0.7평) 공간이 배정됐다. 벼룩시장이 공식 개장하는 낮 12시가 되자 뚝섬 유원지 옆 공터는 돗자리 좌판을 편 500여명의 '일일상인'들로 가득 찼다.

김현애(48)씨는 집에서 쓰던 수저·밥그릇·동화책·아기 옷을 풀어놓고 있었다. 그는 "집에 팔 물건이 더 이상 없어서 오늘은 친척들에게서 쓰지 않는 물건을 얻어서 나왔다"며 "택시 운전하는 남편 월급으론 생활이 빠듯해 반찬값이라도 보태려고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물건 하나에 500원에서 3000원까지 받고 팔지만 매주 나오면 한 달에 20만원 정도는 번다고 했다.

공터 한편엔 오래된 올림푸스 카메라와 간이 족욕 기계, 전자 사전 등 잡다한 소형 가전을 잔뜩 진열해놓고 있는 부부가 있었다. 외항선원 출신인 민모(60)씨와 김오금(61)씨 부부였다. 김씨는 "남편이 외항선을 타다 더 이상 일을 못해 이곳에서 물건을 판다"고 말했다. 김씨는 "남편이 '외로울 때 들으라'며 40년 전 사다준 라디오까지 팔았는데 그게 좀 미안하다"고 했다.

민씨 부부처럼 한 시절 추억과 사연이 담긴 물건을 좌판에 내놓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주부 김윤지(51)씨는 25년 전 결혼기념일에 남편이 사준 한복 노리개를 3000원에 내놓고 있었다.

◆몰락한 중산층·장애인·노인들도 '일일상인'으로

뚝섬 벼룩시장엔 몰락한 중산층, 다른 생계수단이 마땅치 않은 노인과 장애인 가장도 많았다. 매주 토요일마다 이곳에 나와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는 한 30대 주부는"외국산 고급 식기나 값나가 보이는 오래된 전축 같은 것을 들고 나와 파시는 분들이 종종 있다"며 "'옛날엔 부유하게 사셨던 분 같은데…'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고 말했다.

휠체어에 앉아서 물건을 팔던 여상도(63)씨는 "이 나이와 이 몸에 일 구하기는 힘들다"며 "아이가 없어 조카들이 주는 곰 인형·동화책 같은 물건을 팔아서 돈벌이를 한다"고 말했다. 밥솥·대야·아이들 식판·숟가락 등을 팔던 유말련(71) 씨는 "어디서 장사할 요량은 안 되고, 며느리 눈칫밥 먹느니 여기 와서 물건을 팔아 돈 버는 게 낫다"며 "작년부터 매주 나왔더니 이젠 옆집에서 물건 팔라고 쓰던 물건을 쥐여준다"고 말했다. 이곳을 자주 찾는다는 한 노인은 "사람 사는 냄새가 나서 좋다"면서도 "6·25 동란 이후 집에서 쓰던 은수저·요강·가락지 등을 팔았던 기억이 떠올라 좀 씁쓸하기도 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