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방(모셔온 글)/세상사는 이야기

자폐증은 천재의 병일까?

손경형 2019. 4. 4. 14:31

청소년을 위한 정신의학 에세이

자폐증은 천재의 병일까?

자폐증

더스틴 호프만이 자폐증에 걸린 형으로 나오고 톰 크루즈가 형에게 남겨진 유산을 뺏으려는 야박한 동생으로 나온 〈레인맨〉이라는 조금 오래된 영화가 있다. 두 사람은 여행 중 우연히 도박장에 들어갔다가 블랙잭이라는 카드 게임을 하는데, 이 게임은 지금까지 나온 카드의 패를 외우면 다음에 나올 것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게임에서 이길 확률이 높아지는 특징이 있었다. 그런데 동생은 형이 카드의 패를 모두 외우는 재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장애인으로만 알았던 형에게 이러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안 동생은 카드 게임의 룰을 가르쳐 라스베이거스로 진출한다. 그런데 형은 정말 천재인 것일까?

자폐증에 관한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면 천재적으로 피아노를 잘 치거나, 어떤 사물을 보면 기가 막힐 정도로 똑같이 그려 내거나, 숫자에 대해서는 비상할 정도로 계산하고, 아주 오래전에 벌어진 사건들까지도 세세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나온다. 이들을 바보 석학(idiot savant)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쉽게도 이런 사람들은 자폐증 환자의 본질에서 많이 벗어난 극히 일부일 뿐이다.

사회성의 결여

자폐증은 정신건강의학과 영역에서 볼 때 상당히 중증의 질환이다. 현대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자폐증은 '범발달 장애(pervasive development disorder)'라는 진단명이 있다. 대부분 만 3세 이전에 특징적인 증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회적 관계 맺기, 의사소통 능력, 특정한 영역에만 흥미를 지니거나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20세기 초기에 정신 분석학이 유행하던 시절에는 엄마와 아이 사이의 애착 형성이 실패한 결과 자폐증이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아이에게 무관심하거나 바빠서 아이와 충분히 관계를 맺지 못하면 아이는 더 이상 타인과 관계 맺기를 포기하고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든다. 바쁜 엄마가 냉장고 안에 우유를 미리 타 놓고는 아이가 울면 우유병을 꺼내 아이의 입에 물려 주고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가 버리는 행동을 비판하는 '냉장고 엄마(refrigerator mother)'라는 단어로 자폐증을 조장하는 차가운 엄마의 모습을 묘사했다. 그러나 자폐증은 선천적인 생물학적 이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병이다.

뇌파나 CT, MRI에서 이상 소견을 보이는 경우가 많고, 부검해 보면 소뇌의 퍼킨제 세포(Purkinje cell)1)의 수가 적은 것이 발견된다. 형제 중에 자폐증이 있는 경우 일반인의 50배 정도로 나타날 확률이 높아지는 등 유전적 성향도 강하다. 이는 엄마-아이 사이의 애착과 같은 심리적 원인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타고난 생물학적 결함을 지닌 중증 뇌 질환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대부분 자폐증 환자는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정신 지체를 동반한다. 언어 능력도 떨어지고 일상생활을 혼자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중 30퍼센트는 IQ가 70이 넘고 학습이 가능하다. 앞에서 언급한 비상한 재주를 가진 자폐증 환자들이 이에 속하는데, 이를 고기능 자폐증이라고 한다.

이 중 지능은 정상 수준이지만 사회적 관계 맺기 능력만 현저히 떨어지는 경우 '아스퍼거 증후군'이라고 진단한다. 이들은 그림을 똑같이 그리거나 숫자를 외우는 능력, 패턴을 찾아내는 능력은 탁월하지만 창조적인 예술성은 없다. 똑같이 모사하거나 모방할 수 있을 뿐이다. 자폐증 환자의 탁월해 보이는 능력은 '천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런저런 결함이 있지만 궁극적인 문제는 사회성의 결핍이다. 그것이 그들이 사람과 더불어 지내기 힘든 근본적인 이유다. 사람이 집단을 이루고 살게 된 이후 사회성은 생존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더 나아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

사회성의 시작은 눈을 맞추는 것부터다. 그런데 흔하고도 가장 빨리 확인할 수 있는 자폐증 증상이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다. 수줍음이 많고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상대방과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한다. 그가 내 생각을 알아차릴까 봐 겁이 나고, 괜히 맞서려는 인상을 줬다가 당할까 봐 무섭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폐증이 있는 아이는 눈을 맞출 필요를 못 느낀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 파충류에서 포유류로 진화하면서 대뇌의 가장 큰 변화는 변연계를 가졌다는 것이다. 변연계는 수많은 경험을 감정의 코드로 통합해서 농축해서 즉각적으로 반응하도록 감정을 학습한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눈과 바로 연결되어서 직관적으로 반응하도록 돕는다.

그런데 자폐증이 있는 경우, 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 눈을 마주쳐야 그 사람의 느낌을 이해할 수 있는데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니, 상대방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느낄 수 없어서 답답하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거나 무서워하는지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자폐증이 있는 아이의 눈을 억지로 맞추면 공허하고 초점이 맞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신 지체가 중증인 경우라면 언어 발달도 느리고 행동도 같은 나이의 아이에 비해 발달 수준이 낮다. 만 5세에 지능 지수 50인 아이라면 2세 수준의 발달 능력을 보이기 때문에 말을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폐증과 달리 사람들과 의미 있는 감정을 나누고 애착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자폐증 아이를 안았을 때에는 마치 나무 둥치를 안고 있는 것 같지만, 정신 지체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정신 지체와 자폐증은 비슷한 면이 있지만 질적으로 다른 문제다. 오가는 감정이 없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를 마음 이론(theory of mind)이라고 한다. 마음 이론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샐리와 앤'이라는 실험이 있다.

샐리와 앤

샐리와 앤이 한 방에 있다. 샐리가 공을 바구니에 넣고 방을 나간다. 그사이에 앤은 그 공을 꺼내 상자 안에 넣었다. 샐리가 방으로 돌아오면 공을 어디에서 찾을까? 마음 이론이 형성되지 않은 아이나 자폐증인 아이는 상자라고 답한다. 마음 이론이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능력으로, 내 안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가상적으로 만들어 '아, 저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구나, 저 사람의 상황은 이렇겠구나'라고 그려 보는 것이다. 샐리가 방을 떠나 있는 동안 앤이 공을 옮긴 것이므로 샐리는 그 공이 옮겨진 것을 보지 못했다는 샐리의 상황을 마음속의 가상 공간에서 재연할 수 있지만, 자폐증 아이는 자신이 본 것만 생각한다. 그러니 당연히 공을 옮긴 것을 본 그 결과에 대해서만 말하지, 샐리의 상황은 고려하지 않는다. 이것이 마음 이론이다.

 

자폐증은 천재의 병일까? 본문 이미지 1

 

사람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해 의사소통을 하며,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읽고 표현하면서 사회를 형성한다. 인간의 사회화(socialization)라는 것은 타인의 마음을 읽고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이 얽히고설키고 축적되면서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안타깝게도 자폐증 환자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선천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다. 자기가 본 세계밖에 모르고, 가상의 세계나 상징과 은유,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과 모양 양초와 진짜 사과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동차 장난감을 줘도 그것이 자동차라는 실체를 축소한 것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자동차를 굴리고 비행기로 날아가는 흉내를 내면서 놀지 못하며, 자동차 바퀴를 굴리면서 바퀴가 돌아가는 운동성을 즐길 뿐이다. 책을 읽는 것 같아 보여도 사실 책을 읽지 못한다. 그림책 속의 그림이 표현하는 상징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책만 읽는다고 부모들은 말하지만, 사실은 책장 넘기는 소리와 감촉을 반복해서 느낄 뿐이다.

그래서 자폐증 아이의 부모들은 슬프다. 아무리 정성을 쏟아도 아이에게서 돌아오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말아톤〉의 초원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동물의 왕국〉은 봐야 하고, 상황이 어찌 되었건 자기가 맡은 일을 다 하고 나면 초코파이를 먹어야 한다. 그러니 비장애인인 동생은 복장이 터지고 화가 나서 형이 밉고 짜증날 뿐이다. 어릴 때는 그런가 보다 했지만 엄마의 관심이 모두 형에게 쏠려 있다는 박탈감과 사춘기의 충동성이 더해지며 참을성은 바닥나고 형을 미워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엄마는 그런 동생 때문에 답답해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초원이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것이 자폐증의 아픔이고 비극이다. 그래서 교육과 애착 증진 훈련 등을 통해 아이가 도움을 받은 다음에 "감사합니다"라고 눈을 마주치면서 말하면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처음으로 의미 있는 감정의 등가 교환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혼자 살 수 없는 사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저 친구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이지?", "내가 없는 사이에 친구들은 나에 대해 무슨 말을 할까?"라는 식으로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며 사회적 관계 맺기의 최적화를 위해 노력한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번 타이밍을 놓치거나 잘못 판단해서 속병을 앓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 능력은 굉장히 복잡한 대뇌의 정보 처리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섬세한 발달의 결과물이다. 주변 상황이나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 상대방 분위기를 얼굴 표정만으로 알아차리는 능력은 사람마다 차이가 난다.

비장애인 중에도 자신만의 세계에서 오직 자기가 본 세계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을 보면 정말 답답하다. 자폐증 환자와 부모가 애착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답답해하듯이, 그런 사람과는 '정들기'가 참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은 그 사람의 고지식함과 이기적인 면 때문에 괴로워하는 데 반해, 정작 당사자는 자폐증 환자처럼 전혀 답답해하지 않아서 힘들다. 도리어 "왜 세상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생각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지?"라면서 세상을 탓한다. 이런 사람은 결국 자신만의 세계에 고립되고 말 것이다. 자폐()란 자기()를 폐쇄()한 것이다. 사회란 혼자 살 수 없는 곳인데 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폐증은 천재의 병일까? - 자폐증 (청소년을 위한 정신의학 에세이, 2012. 6. 30., 하지현, 신동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