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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인 고산씨, 3년만에 만나보니
손경형
2011. 11. 5. 11:20
- 우주인 고산씨, 3년만에 만나보니 시사INLive2011.11.05 03:34 임지영 기자 입력
- 수정 2011.11.05 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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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씨(35)라고 하면 갸웃한다. '우주인 고산'씨라 해야 안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는 '우주인 고산'이 자동 검색어로 뜬다. 정말 우주에 다녀온 건 아니다. 기회는 있었다. 2008년 한국인 최초로 우주선 탑승자에 선발됐지만 발사 한 달을 앞두고 교체됐다. '진짜 우주인' 이소연씨가 귀환하는 모습을, 이씨의 가족과 함께 지켜봤다.
비운의 사나이라 불렸던 고씨를 만난 건 10월17일, 미국행 출국을 하루 앞두고였다. 우주복 입은 사진에서 보던 대로 까무잡잡한 피부와 진한 쌍꺼풀을 가졌다. 서울 소재 한 대학의 계절학기 강의 일정을 조율하고 오느라 좀 늦어졌다고 했다. 이번 겨울방학, 학생들에게 창업과 관련한 강의를 할 예정이다.
ⓒ시사IN 조우혜 고산씨(위)는 올해 초 비영리단체 타이드를 설립해 과학기술 기반의 창업을 지원하고 있다.
우주복을 벗은 지는 3년. 그에게는 '아깝게'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었다. 행운의 문턱에서 좌절했던 경험 때문이다. 3만6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러시아 가가린 우주비행사 훈련센터에서 1년간 훈련을 받았다. 국가 세금 300억원이 들었다. 우주인으로 최종 선정됐지만 탈락했다. 길고 복잡한 당시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러시아 내부 관계자의 도움으로 우주 기술과 관련된 문서를 복사해 가져왔다가 발각됐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고씨가 스파이였다는 둥 루머가 나돌았다.
빼내온 문서의 내용은 지금도 말할 수 없다. 당시, 러시아 당국은 도움 준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면 우주인 자리를 유지시키겠다고 했다. 군인이라 밝힐 수 없었다. 그래도 이것만은 밝히고 싶다. 국내 최초의 우주인이 되는 건 우주 관광객과는 다르다고, 당시 그는 생각했다. 우주를 오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이 필요했다. 그걸 모르고 다녀온다는 건 그의 신념과 맞지 않았다. 물론 아쉬움은 남는다. 국가 간 협약을 통해 좀 더 긴밀히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었더라면 하는. 여기까지, 우주인 스토리는 재미없다고 고씨가 잘라 말했다.
우주인 탈락에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러시아에서 훈련한 1년간,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됐다. 귀국길에 그는 "우주인이 되기 위해 러시아에 갔다가 한국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라고 말했다. 밖에서 본 한국은 종이상자 같았다. 그럴듯하지만 속이 빈 종이상자처럼 뭉개면 금방 찌부러질 것 같이 보잘것없었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국가 간 경계가 무의미하다. 땅과 물의 경계밖에 없다는 의미다. 로맨틱한 말이다. 그런데 밤에 보면 달랐다. 전기를 맘껏 쓸 수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 간 경계가 확실했다. 고씨가 당시에 느낀 것도 국가 간의 엄격한 경계였다. 한국도 과학기술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뼈저리게 들었다. 과학기술 정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다.
과학정책을 공부하기 위해 하버드 케네디 스쿨 공공정책학과에 지원했다. 그전에 잠시 실리콘밸리 싱귤래러티 대학에 들렀다. 첨단 과학기술, 융복합기술 등과 창업을 연관시킨 프로그램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전문가와 창업자들이 강의를 하고 학생들이 실제 창업 아이디어를 내 투자를 받았다. 미국 실업률은 우리보다 높은데, 학생들은 활기가 넘쳤다. 인근 어느 바에 가더라도,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젊은이를 볼 수 있었다. 한국의 이공계 젊은이들도 한걸음 앞만 제시해주면 다른 길을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네디 스쿨에 다닌 지 1년, 휴학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Reuter=Newsis 2008년 모스크바 인근 스타 시티에서 훈련을 받으며 '한국 최초의 우주인'을 꿈꾸던 당시 고산씨.
얼마 전 그는 애플사의 최고경영자였던 스티브 잡스의 죽음에 부쳐 '똑똑한 아이에게, 너는 세상에 많은 가치를 더하는 훌륭한 기업가가 되라고 격려해볼 만하다'라는 글을 남겼다. 사회에 가치를 부여하려는 기업가 정신을 가진 젊은이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올 초 타이드를 만든 뒤 그는 두 차례 창업경진대회를 열었다.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많이 나왔다. 마침 사회 전반의 분위기도 좋은 편이다. 바닥을 쳤던 벤처 붐도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가 사례로 소셜 커머스를 들기에 얼마 전 외국계 기업에 매각해 '먹튀' 논란을 일으킨 소셜 커머스 1위 업체 '티켓몬스터'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그가 보기에는 오히려 성공적인 사례라고 했다. 국내에 M & A할 기업이 없어 국외 기업에 매각을 한 것이고 경영진도 그대로인데 먹튀라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얘기다. 최근의 창업들이 성공한 외국 사례를 카피하는 데 머무르는 건 아쉽지만 고무적이라고 평가했다.
타이드에는 오르그닷, 윙버스 등 사회적 기업이나 소셜 커머스 창업의 경험을 가진 스태프들이 섞여 있다. 스태프 중에는 유엔에서 일한 유영석씨도 있다. 유씨에 따르면 유엔사무국 직원은 공무원 중에서도 공무원이라고 한다. 국제기구에서 일하기를 꿈꾸는 청년이 늘고 있지만 수많은 국가의 견해를 조율해야 하는 자리라 생각만큼 혁신적이지 않다. 한국에서 바꿀 수 있는 게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런 젊은이를 만날 때마다 고씨는 말린다. 어떤 방식이든 인재가 외부로 유출되는 게 아쉽다.
겉으로만 보면 고씨의 인생 이력은 말 그대로 '엄친아'의 그것이다. 한영외고, 서울대, 서울대 대학원, 우주인 선발, 하버드 대학원. 최초의 실패는 우주선에 탑승하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실패하면 안 됐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 미용 기술을 가진 어머니가 고씨와 여동생을 뒷바라지했다. 외국어고를 다니려면 보통 학교보다 돈이 많이 들었다. 비용 때문에 셔틀버스를 타지 못한 적도 있었다.
우주인에 뽑힐 당시 3만6000대 1의 경쟁률을 뚫었지만 승부욕이 강한 성격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걸 싫어한다. 무슨 일을 하든 스스로의 만족도를 높게 여긴다. 고등학교 때 전교 1등을 처음 했는데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왜 이렇게 쉬운가, 어부지리로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곧 원래 등수로 돌아갔다. 요행보다는 노력에 맞는 합당한 대가를 편안해한다. 그의 독서 취향을 듣다 보면 좀 엉뚱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좀 더 분명해진다. 솔제니친의 <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 를 재밌게 읽었다. 내용보다는 견딜 수 없이 더러운 감자국이 나오는 수용소 생활을 보며, 나도 힘들지만 저 정도는 아니라는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맛없는 학생회관 음식도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고.
최초의 우주인 자리는 놓쳤지만, 곧 우주인이 될 거란 확신은 있다고 그는 말했다. 민간에서도 속속 우주선을 개발하고 있다. 우리 기술로 다녀오면 더 좋을 것 같단다. 인터뷰 다음 날, 출국을 몇 시간 앞둔 그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적게 한 것 같아 아쉽다는 민원이었다. 그는 희망제작소와 함께 10월20~30일 미국 실리콘밸리 싱귤래러티 대학에서 한국 유학생을 대상으로 창업경진대회를 연다. '우주'에 이어 '창업'에 꽂힌 고씨의 다음 행선지가 궁금해졌다.
임지영 기자 /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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