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들의 바람, 내 남편 이랬으면 좋겠다
아내들의 바람, 내 남편 이랬으면 좋겠다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남편과 결혼할 것인가, 란 물음에 90%의 아내들이 'NO'라고 응답했답니다.
같은 질문에 남편들의 80%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겠다고 했습니다. 지금의 아내가 그래도 괜찮아
서, 혹은 편해서, 좋아서인 경우도 있고 여태까지 고생만 시켰으니 다시 태어난다면 아내에게 진 빚
을 갚기 위해 다시 결혼하겠다는 다짐이나 소망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남편들에게 있어 90%의
거절은 참 억울하고 슬픈 수치일 수있겠습니다. 더 잘해주고 싶어 또 한 번의 기회를 원하는데 아내
들은 그런 남편의 마음을 전혀 알아주지 않으니 말입니다. 왜 아내들은 지금의 남편과 이승에서의
한 번 인연으로 끝맺음하고 싶은 걸까요? 도대체 그녀들은 어떤 남자를 만나고 싶어 지금의 남편을
거절하겠다는 것일까요?
아내들의 바람 "내 남편, 제발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따뜻한 한 마디로 아내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주는 남편
부부간에도 경제력은 크게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경제력이 부부 사랑을 송두리
째 흔들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편에게 부족한 것들을 잘 참고 견디며 최선을 다해 채
우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는 남편 때문에 속상해 합니다.
오늘 애 썼어. 힘들었지? 고마워. 당신 힘드니까 그 일은 내가 할게.
돈 안 들이고 아내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길, 무궁무진합니다.
아내를 존중해주는 남편
당신이 뭘 알아? 눈 아래로 내리깔며 빈정대듯 하는 한 마디에 아내들의 가슴은 꽁꽁 얼어붙고 맙
니다. 그래, 넌 뭘 아는데? 이런 식으로 맞받아치고 싶어집니다. 특히 자녀들 앞에서 아내에게 함부
로 말하게 되면 엄마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둘이 있을 때보다 더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잘했어. 당신 생각도 좋지만 이렇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당신이 최고야. 역시 우리 마
누라야.
어렵지 않은 말 한마디로 아내는 행복해지고 그렇게 얻은 행복을 가족들에게 몇 배로 튀겨 나눠 줄
것입니다.
제왕 같지 않은 남편
세상사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집에 와서 풀거나 밖에서 힘들었
다는 이유로 집에 들어와 대접만 받으려고 한다면 가정의 평화는 깨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요즘에는
여자들도 사회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남자들 만큼 많은 돈을 벌어들이지는 못해도 여
자들의 고충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집에 오면 아이들 건사하고 집안 일 도맡아 해야 합니
다. 차려주는 밥상을 기다려도 되는 때는 지났습니다. 이제 남편들도 팔 걷어 부치고 설거지든, 청소
든 함께 해야 합니다.
내가 설거지 할 테니 당신은 다른 일 해. 청소는 내가 할게. 오늘은 일찍 일 끝내고 쉬어.
이런 남편을 배신할 아내는 없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서 받은 사랑을 꼭 그만큼이 아니라 두 배,
세 배로 불려서 갚고 싶어합니다.
보수적이고 봉건적이지 않은 남편
고리짝 시절 풍습을 교과서인양 붙들고 있는 남편과 사는 아내, 속이 터집니다. 요즘 아내들은 남편
들이 변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여자니까, 아내니까, 혹은 주부니까, 라는 명목
은 아내들을 옭아매는 튼튼한 오랏줄임에 분명하지만 아내들은 그 줄에 묶이고 싶지 않습니다. 여자
이기 이전에, 아내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 존중받고 싶어합니다.
결혼은 꿰맞춤입니다. 울퉁불퉁한 나를 깎아내어 배우자에게 맞춰야 하고, 부족한 나를 채워 그에게
보태야 하는. 그런데 그 꿰맞춘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습니다. 뼛속까지 박힌 습성을 다듬고 버린다
는 게 어찌 쉽겠습니까. 하지만 결혼생활에 성공했다면 인생의 반은 성공한 셈입니다. 어차피 결혼한
사람들의 바탕은 가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둘러 보십시오.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한 사람들
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령 그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일지라도 그렇습니다.
반면에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했을지라도 가정생활이 원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 만족해하며 행복해합니다.
돈 들이지 않아도 되는 일, 크게 힘들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많습니까. 소소한 일들
때문에 행복하고, 소소한 일들 때문에 불행해질 수 있는 게 인간의 삶입니다.
당신의 아내는 어느 쪽에 서 있습니까? 90%? 아니면.....
[잘못인줄 알면서도 말 한 마디 못하는 세상]
휴일 저녁 1호선 전철은 비교적 한산했다. 군데군데 빈자리가 있었고 사람들은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더러는 졸기도 했다. 그런데 한 가족이 전철에 올라온 다음부터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두 아이들이 난리를 친 것이다. 그들은 내가 앉은 곳 바로 건너 편에 자리를 잡아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나뿐 아니었다. 둘이서 워낙 시끄럽게 떠들기도 하고 행동반경이 커서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도 그들에게 집중했다. 큰아이는 여섯 살 정도 되어 보였고 작은 아이는 네 살쯤
되어 보였다. 둘은 신발을 신은 채 의자 위에 올라 서서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전철에 있는 기둥을
잡고 그네를 타기도 했다. 그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그렇게 노는 것도 지겨웠던 것일까. 급기야 두 아이는 전철 3량을 100m 달리기 선수처럼 내달리
는 것이다. 한 아이는 맨발이었고 또 한 아이는 신발을 신은 채였다. 그런 난동에도 두 아이를 말
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번 달리고 나니 맛이 들린 것인지 아이들은 몇 번을 그렇게 되풀이
했다. 달리는 것도 어느 정도 시들해졌는지 둘은 다시 제 부모가 있는 부근으로 갔다. 아이들은 여
전히 소리를 지르며 그네를 타거나 신발을 신은 채 의자 위에서 콩콩거리며 뛰었다. 그러는 동안
도 그들 부모는 아이들을 저지시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동승한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입도 뻥
긋 못했다. 말 한 마디 못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평소 그런 꼴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사람이지
만 그들 부모 얼굴이 그렇게 만들었다. 30대 중반쯤 되었음직한 부부는 덩치도 크지만 특별히 아
이 아빠 얼굴이 어찌나 험악해 보이는지 절로 움찔해졌다.
큰 아이가 자리를 옮겨 노약자보호석 의자 위로 신발을 신은 채 낼름 뛰어 올라가 장난을 치기 시
작했다. 이때 예순 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남자 어르신이 한 말씀 하신다.
"애야, 너희 아빠가 그러지 말라고 했지? 넌 아빠 말씀을 안 듣는구나. 아빠가 그렇게 가르치지 않
았잖아?"
아빠가 아이들을 저지하거나 만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시종일관 아이들을 방치했고
아이들이 하는 행동에 대해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어르신은 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
까? 그분 역시 모든 것을 지켜 보고 있었으니 그 아이들의 부모가 아이들을 내버려 뒀다는 걸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뭐라고 했다가 봉변을 당할까 두려워 에둘러 말한 것이다.
'너희 부모는 왜 너희들을 그렇게 키우는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참 짜증이 난다.' 이 말 대신
'너희 부모는 자식을 그렇게 가르칠 리 없는데 네가 말을 듣지 않는 거지?'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참 속 터질 일이다.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다니! 보복
이 무서워 말 한마디 못하고 속으로만 끌탕하는, 나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또 뭐란 말인가!
그렇게 조심스럽게 던진 한 마디에도 아이 아빠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에둘러 말한다고 했지만
그 어르신의 속내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그 육중한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워 아이의 손
을 잡고 느릿느릿 옆칸으로 갔다. 아이들을 떨어뜨려 놓기 위해 그러나 했더니 금방 돌아왔고 그
들은 이후 두 정거장을 거치는 동안도 여전히 꺅꺅거리며 신나했다.
남들이 눈쌀 찌푸리고 불편해 하는 걸 알면서도 아이들을 방치하는 것이 사랑인가. 아무리 자식이
귀해도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가르쳐야 되지 않을까. 무엇이 남에게 피해
를 주는 행동인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왜 잘못인지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어떻게 온전한
어른이 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