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콩트

사장님의 구두[1991년 한아름의 행복 제2집, 2017년 시와 이야기가 흐르는 카페]

손경형 2011. 1. 5. 11:58

 

                                    사장님의 구두

 

                                                       손 경 형(200자 원고 23)

 

 

   병주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차창 너머로 전철을 타지 못한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전철 안에 있는 사람들을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지만 병주는 기쁘지 않았다. 싸우듯 사람들과 아귀다툼을 벌이고, 간신히 전철 안에 발을 들여 놓을 때는 일단 지각을 면했다는 생각에 깊게 한숨까지 쉬었지만, 막상 많은 사람들 속에 끼여 수족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그 행운도 잠시라는 생각에 슬며시 화가 났다.

   병주는 언제 이 지옥 같은 출퇴근길을 면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 흔한 차 한 대 없이 그저 생활에 떠밀려 다니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고 한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들 속에 시달리고 나면 상쾌해야 할 하루가 엉망이 되고 만다.

   평상시 병주는 교통 혼잡을 피해 다른 사람들보다 약 30분정도 먼저 출근하는 편이다. 그런데 오늘은 아침부터 아내가 바가지를 긁는 통에 출근이 늦어졌다.

   - 여보, 나 용돈 좀 올려주지.

   병주의 말 한마디에 아내는 병주에게 틈을 주지 않고 몰아 부친다.

   - 당신 정신 있어요. 뻔한 월급에 생활비 빼고, 애들 유치원 보내고, 주택부금 붓고 나면 남는 돈 있는 줄 아세요.

   - 알았어, 그만둬. 당신은 말만하면 매일 돈, , 돈타령뿐이니……. 당신은 남편이란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돈을 찍어내는 은행인 줄 알지. 지겨운 월급쟁이 그만두고 구멍가게라도 해볼까? 그럼 사장소리 듣고, 마음 편하고…….

   - 당신이라는 남자, 정신이 정말 없군요. 왜 그 좋은 직장마다하고 사서 고생하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 형편에 가게 시작할 목돈이라도 있어요?

   병주는 살림에 찌든 아내의 억센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아까부터 병주의 코끝을 간지럽히는 앞에 선 여자의 긴 머리카락에서 향긋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병주는 그 냄새가 싫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아내에게서 이런 향기가 사라진지 오래다. 요즘 아내의 모습을 떠오르면 화장기 없는 얼굴, 부시시한 머리, 김칫국물이 배어있는 단정치 못한 옷차림…….

   처녀 때 아내는 그런대로 멋을 부릴 줄 아는 센스 있는 여자였다고 병주는 생각했다. 그런 아내를 철저하게 생활인으로 변하게 만든 것이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병주는 언제부턴가 그런 아내의 무질서를 비난하기보다는 무능력한 자신을 탓하기로 마음먹었다.

   병주는 아내와의 다툼을 생각하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사무실로 들어섰다.

   -박 주임, 어디 아픈가?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 월급쟁이들은 몸이 재산인데 조심해야지.

   최 과장이 병주에게 말했다.

   - 아닙니다.

   병주는 자신에게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힘 있게 대답했다

   - 커피 드시고 힘내세요.

   미스 김이 병주 책상 위에 자판기 커피 한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방금 커피를 뽑아온 듯 뜨거운 김이 모락거리며 커피 특유의 향기를 풍겨냈다. 커피를 마시며 병주는 기분을 새롭게 하려고 했다.

   - 구두 닦으세요.

   이른 시간부터 이 씨가 나타나 슬리퍼를 내밀며 병주의 발에서 구두를 낚아채듯 벗겨갔다. 이 씨의 손놀림은 기계처럼 정확했다. 그는 벌써 여러 컬레의 구두를 손에 겹쳐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병주는 급히 그의 등 뒤에다 소리를 질렀다.

   - 결재 맡으러 갈지 모르니까 구두 일찍 갖다 주세요.

   복도 쪽에서 얼굴 없는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것처럼 들려 왔다.

   - 알았습니다.

   최 과장이 병주를 손짓하며 불렀다. 병주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과장 책상 앞에 섰다. 책상 밑으로 보이는 최 과장의 슬리퍼 신은 발이 흔들거렸다.

   - 이 서류 다시 확인해 봐요. 작년 하반기 그래와 올 상반기 그래프가 바뀐 것 같은데 검토 안 해 봤어요?

   병주는 최 과장에게 서류를 넘겨받고 미스 김에게 다시 수정해서 타이핑하라고 일렀다. 미스 김이 가져온 서류를 검토하고 병주는 다시 최 과장에게 결재를 올렸다.

   - 잘됐어요. 시간이 없으니까 이 서류는 박 주임이 직접 김 부장님께 갖다드려요.

   병주는 당황했다. 슬리퍼를 신고 결재를 올려야 하다니.

   병주는 서류를 가자고 옆 사무실로 들어갔다마침 총무과 미스터 강의 구두를 빌려 신을 수 있었다.

   병주는 작은 구두에 발을 구겨 넣고 절룩거리며 김 부장에게 결재를 마치고 복도에 섰다. 한 층 걸어 올라가면 사무실이지만 다리가 아파 걸을 수 없었다. 병주는 엘리베이터 단추를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안으로 들어서던 병주는 주춤하고 다시 복도 쪽으로 내려섰다. 중역들과 사장이 타고 있었다.

   - 우리 급한데 빨리 타지.

   사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아닙니다. 먼저 올라가시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병주는 잠시 멍한 상태로 서 있다가 뛰다시피 계단을 올라 사무실로 왔다병주는 슬리퍼를 신은 사장의 모습을 떠올리며 괜한 웃음을 지었다.

   이 씨가 닦은 구두를 가져왔다. 구두를 벗겨갈 때처럼 민첩하게 슬리퍼를 챙겨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 좀 일찍 가져오지. 어 그런데 이상하다. 갑자기 구두가 커진 것 같아.

   구두를 신으며 병주가 중얼거리자 모두들 웃었다.

   - 그럴 리가 있나요.

   미스터 백이 말했다.

   병주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멀쑥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마침 이 씨가 잔돈을 가지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 이 씨 이리 좀 와 봐요. 내 구두가 갑자기 커진 것 같아.

   병주는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걸어 보이며 말했다.

   - 제가 보기에는 딱 맞는데요. 아침부터 농담하지 마세요. 제가 이 짓한지 10년이 넘었답니다. 그리고 이 구두 신는 사람 이 회사에서 박 주임님 한 분이예요.

   병주가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오는데 먼저 와 있던 미스터 백이 말했다.

   - , 나 박 주임님 구두하고 똑같은 것 신은 사람 본 것 같은데!

   병주는 미스터 백이 자기를 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 그래, 그것 참 이상하군. 이 씨 말로는……. 그런데 구두 임자가 누구야.

   - 그럴 리는 없지만 사장님……?

   - ? 말도 안 돼. 정말 그렇다면 나도 출세했네. 사장님과 똑같은 구두를 신다니.

   - 혹시 사장님 구두와 바뀐 것이 아닐까요? 아까 주임님이 구두가 큰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사장님 걸음걸이가 약간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미스터 백이 장난 끼 있는 목소리로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 꿈보다 해몽이 좋군. 하지만 틀렸어. 이제는 구두가 크지 않은 것 같아. 내 착각이었어.

 

   최 과장이 퇴근하는 병주에게 말했다.

   - 박 주임 오늘 한잔 어때? 내가 한 잔 살 테니까 가지.

   두 사람은 다른 직원들과 함께 회사 앞 돼지 갈비 집으로 들어갔다.

   술잔이 오가며 사람들은 낮에 있었던 병주 구두이야기를 다시 입에 올렸다.

   - 글쎄 말입니다. 아침부터 아내가 잔소리를 하더니만 하루 종일……. 다 기분 문젠 것 같습니다. 갑자기 구두가 커지다니 말이 됩니까. 더군다나 사장님구두하고…….

   사람들은 병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어느 날이던가 내가 퇴근하려고 벗어 놓았던 양복저고리를 입을 때였어요. 내 옷이 분명한데 순간 남의 옷을 입는 것처럼 어색하게 느껴지더라구요.

   - 며칠 전이었어. 우연히 새벽에 눈을 떴는데 옆에 자고 있는 아내가 낯설게 느껴지는 거야.

   미스터 백과 최 과장이 병주의 말에 공감을 표시하며 자기의 이상한 경험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 불쌍한 샐러리맨을 위해 우리 건배 합시다.

   최 과장의 말에 일제히 소주잔이 팔위로 올라갔다.

   - 건배.

   그들은 마음을 모아 소리를 지르고 마지막 잔을 기울였다.

   - , , 밤도 깊었으니 그만 일어납시다. 총각들은 낼 생각해서 2차 가지 말고…….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은 마루 끝에 서서 자기 신발을 찾아 신기 바빴다. 마침 옆방에서 음식을 먹던 팀이 나왔다. 회사 중역들과 사장이었다.

   - 나도 40대까지 월급쟁이였다네. 힘들 내시게.

   사장이 병주의 뒤를 따라오며 모두가 듣도록 크게 말했다. 병주의 구두는 왼쪽 마루 끝에 있었다. 병주는 사장이 계속 자기 뒤를 따라오자 무언의 몸짓으로 앞서가라고 길을 비켜 주었다.

   - , 이제 발이 편해졌네. 이상하게 아까는 꽉 끼는 느낌이었는데.

   걸음걸이를 일부러 크게 하며 사장이 같이 온 일행에게 말했다.

   - , 내 구두……?

   병주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구두를 신고 걸어가던 사장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  1991년 한아름의 행복 제 2집          현대자동차 가족작품 모음 제 2집 - 끝 -

 

2011년 1월 5일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