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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고기의 유래

손경형 2014. 8. 10. 20:04

                불고기의 유래

 

1. [불고기]란 말은 1950년대 이후, 그러니까 생긴 지 얼마 안 된 말입니다.

2. 불고기란 말의 유래는 여러 추측 중, '살코기를 얇게 저며서 양념을 하여 재었다가 불에 구운 짐승(주로 쇠고기)의 고기' 를 줄여 불고기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불고기는 쇠고기를 얇고 넓게 저며서 양념장을 무쳐 석쇠에 놓고 구운 음식. 예전에는 너비아니라고 하였다. 고기를 진간장, 꿀, 다진 파, 마늘, 깨소금, 후춧가루로 만든 양념장에 재웠다가 굽는다. 너비아니란 궁중과 서울의 양반집에서 쓰던 말로 고기를 넓게 저몄다는 뜻입니다.

한국인의 조상들은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활약하던 유목민족으로 서서히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동이(東夷)계의 맥족(貊族)으로 호칭하고 있었다. 이들은 유목민족이었기 때문에 가축의 고기를 소비하는 음식문화를 간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고기구이는 맥적(貊炙)에서 유래됩니다. 맥은 중국의 동북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고구려를 칭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즐겨 먹는 맥적(貊炙)은 고기류(쇠고기)를 꼬챙이에 꿰어서 직화를 쬐어 굽는 요리인데, 석쇠가 나온 뒤에는 꼬챙이에 꿸 필요가 없어져서 지금의 불고기가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의 진<晋>나라에서도 맥적을 즐겼다고 하는데, 여기서 맥<貊>이란 고구려를 지칭하는 말로 "맥적은 미리 조미해둔 고기를 꼬챙이에 끼워 숯불에 구워 먹는 것"을 의미한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불고기의 원조는 맥적인 이 꼬치구이일 것으로 짐작되고 있습니다. 즉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나 대체로 중국인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한족(漢族)의 고기 굽는 요령은 고기를 미리 조리하지 않고 굽거나 삶아서 조미료에 무쳐 먹는 데 대하여 이 적(炙)은 미리 조미하여 굽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맥적이 불고기의 시조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1천여 년 전에 한반도에 번성하였던 신라와 백제에서는 그들의 오랜 통치기간 동안에 국교로 신봉되었던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肉食)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맥적이 공식적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가정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고려시대에도 불교의 영향으로 고기를 많이 즐기지 않았지만 고려 말에는 '설야먹'이라 하여 불고기와 갈비구이가 요리의 한 형태로 정착되었습니다. 이것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궁중음식인 너비아니로 발전되었는데, 너비아니는 고기를 넓적하게 저민 후 잔칼질을 많이 하여 육질을 부드럽게 하여 굽는 것으로 고기를 얇게 썰어 굽는 불고기와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불고기와 갈비는 김치와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요즘에는 비빔밥과 함께 외국인들도 좋아하는 세계적인 음식이 되었습니다. 특히 1600년대에 쓰여 진 요리책인 '음식디미방'에는 '설야멱(불고기)'을 가지처럼 먹는다'란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꽤 보편화된 음식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장맛

 

고구려는 콩의 원산지이며, 옛 중국 문헌인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는 고구려가 선장양(善醬釀)이라 하여 발효문화가 발달하였다고 합니다. 또 ‘시’의 냄새를 고려취(高麗臭)라고 하며, 진나라의 『박물지(博物志)』에서 ‘시’는 외국 음식이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의 원산지가 바로 고구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의 문헌 중에 된장과 관련된 기록보다는 된장과 유사한 ‘청국장’에 관한 기록이 먼저 나타납니다. 그것은 아마 청국장이 된장보다 앞서 만들어진 식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계 최고(最古)의 농서라 할 수 있는 북위의『제민요술(齊民要術)』이라는 책에 청국장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시(豉)’라는 음식이 나옵니다. 거기에 ‘시’는 “콩을 삶아 짚으로 싼 다음 곰팡이가 끼도록 띄우고 이를 짓이겨 독 속에 밀봉하고 햇볕에 쬐었다가 소금을 섞어 먹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시’는 오늘날 우리가 먹는 청국장과 유사하며, 이후 중국 문헌에서는 콩을 발효한 식품의 통칭으로 불러졌습니다. 

그러면 고구려에서는 어떻게 하여 청국장의 원조인 ‘시’가 만들어졌을까? 고구려의 유장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에 ‘책성지시(柵城之豉)’라고 하여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이 군량으로서 ‘시’를 이용하였다고 합니다. 고구려는 잘 알려져 있듯이 정복사업을 활발히 폈던 나라입니다. 그리고 경제의 상당부분을 정복전쟁을 통해서 조달하였고, 그 결과 부경이라는 창고가 발달하였습니다. 고구려 병사들은 정복전쟁에서 이곳저곳을 많이 옮겨 다녀야 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보급부대가 없이 비상식을 병사들이 직접 지참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삶은 콩을 말안장 밑에 깔고 타고 다니면 사람과 말의 체온을 받아 발효하게 되는데 이것을 비상식량으로 이용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요리할 필요도 없으며 완전식품일 뿐 아니라 고단백질이라 적은 양만 먹어도 많은 힘을 쓸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상할 염려도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휴대식품으로서 최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를 전국장(戰國醬)이라고도 불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에는 낫도(納豆)라는 것이 우리나라처럼 찌개를 만들어 먹지 않고 날것으로 먹는 식품이 있는데, 이것 또한 고구려가 만든 ‘시’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조선시대 실학자 서유구도 『증보산림경제』「장제품조」에 “장은 모든 음식 맛의 으뜸이라고 합니다. 집안의 장맛이 좋지 않으면 좋은 채소와 맛있는 고기가 있은들 좋은 음식을 만들 수 없습니다. 설혹 초야의 사람이 고기를 쉽게 얻을 수 없어도 여러 가지 좋은 맛의 장이 있을 때에는 반찬에 아무 걱정이 없다”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된장이 한국 음식의 기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식품을 보존하는 방법으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띄우는 방법이며 다른 하나는 절이는 방법입니다. 양쪽 모두 발효시킨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띄우는 방식은 청국장과 같이 내륙의 북방민족이 일찍부터 사용해 오던 방법이며, 절이는 방법은 남방의 해양민족이 야채 등을 보존하기 위해 발견한 방법입니다. 우리 민족이 대륙의 북방민족과 남방의 해양민족이 결합되어 형성되었듯이 우리 음식도 북방식과 남방식이 융합되어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전통 가옥인 한옥이 북방민족이 개발한 온돌과 남방민족이 상용하는 마루가 결합되어 완성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전통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음식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된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된장이야말로 한국음식의 토대이면서 그 특징을 형성시킨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된장은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먹는 거의 모든 반찬에 쓰입니다. 그리고 한국음식은 비빔밥에서 보이듯이 여러 가지 반찬을 섞어서 먹는 방법이 발달하였고, 찌개 혹은 탕 음식에서 보이듯이 따뜻한 음식을 선호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의 배후에는 모두 된장이 있다고 봅니다.

된장은 바로 북방민족의 청국장과 담북장이 남방 해양민족의 식문화와 만남으로써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콩을 띄운 청국장 혹은 담북장을 가지고 김치와 같이 소금물에 절이는 조리법을 응용함으로써 탄생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일찍이 부여에서 “콩으로 간장과 된장이 섞인 걸쭉한 장을 담갔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된장의 초기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간장은 메주 덩어리에 소금물을 부어 붉은 고추 숯 지푸라기 등을 넣어 만듭니다.

고추장은 메주를 빻은 가루와 고춧가루, 엿기름과 찹쌀 등등을 섞어 만듭니다.

 

                                                           참고 서적

 

* 우리 음식의 숨은 맛을 찾아라 : 서지원 지음 미래아이 출판

* 우리 음식에 담긴 12가지 역사 이야기 : 김선희 지음 어린이 작가정신 출판

* 밥 힘으로 살아온 우리 민족 : 김아리 지음 아이세움 출판

* 『한국료리문화사』 : 이성우 지음 교문사 출판 1985

 

                         고려와 북방제국

 

돌궐제국의 전성시대에 서쪽 스텦지대는 교역상 절대로 중요한 요충지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돌궐의 멸망과 더불어, 또 동시에 중국의 세력도 급속히 쇠퇴함에 따라서, 그 지역에서 세력의 공백시대가 도래하였다. 그 결과 서쪽 스텦지대의 정치적 역할이 소멸되었고, 오직 중동지방에서 건설된 돌궐계 왕조들의 병력을 공급받는 지역으로 화하였고, 중국과 가까운 지역에서는 수개의 중요한 변방제국이 건설되었다. 그들 중 두 개은 후세에 내려와 중국의 정통왕조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동안 스텦지대의 중앙부에는 무국가 상태가 약 2세기 계속되었다. 이러한 무국가 상태는 12세기 말 수개의 부족들이 몽고연맹을 형성하면서 종식될 수 있었다. 테무진-후의 징기스칸-의 영도력과 전통적으로 내려온 스텦지대의 특성에 따라서 그 연맹은 그 지도자의 영도하에 공고히 단결되자, 여러 세기를 내려오며 스텦유목민의 표적이 되어온 지역, 즉 중국에 대한 정복을 개시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정복은 결국에는 당시까지 알려진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을 지배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최대의 유목.정착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몽고제국이 멸망하면서 그를 계승하는 다수의 국가들이 출현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스텦지대에 건설되었고, 모두가 유목국가와 정착국가의 두 가지 구조가 혼합된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이 계승국가들 중의 몇몇이 -예를 들어 티무르왕조- 잠시동한 흥성한 경우도 있었으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왕조는 하나도 없었다.

몽골의 침략 이전 시대까지의 유라시아 지역의 국가와 민족이 있었다. 유라시아대륙은 동 슬라브 민족을 포함하여 중앙 아시아지역에 형성되는 지배적 영향을 끼쳤다. 몽골의 침략 전 시대까지의 몽골 민족과 그 문화는, 남 시베리아의 부랴트족과 스텦지역의 깔믜끼족과 훈족으로 시작하는 몽고 지역과 바이칼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많은 민족이다. 동 슬라브 민족, 몽골민족과 한국민족간에 있었던 문화의 상호영향, 한국문화의 형성을 고대유물과 문화원류의 이론적 배경을 가지고 스키타이민족문화의 유입과정과 삼국 시대로부터의 문화적 발전과 복식 문화의 특징과 몽골-타타르족의 유라시아 침략과 피 침략민족 문화의 영향을 살펴본다.

몽고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스텦지대의 세계 정치상의 영향도 종식된 것이다. 1세기 이상 유목민족들에게 지배를 받았던 정착국가들은 스텦으로부터 침략에 저항하는 기술을 습득하였다. 전통적인 역할이 서로 바뀌어, 정착국가들의 판도가 스텦 깊숙히 확장되었고, 중국에는 스텦 전체를 완전히 병합하게 되었다. 스텦의 쇠퇴는 중앙아시아 역사상 가장 난해하고 복잡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원인을 고찰하면, 결국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만약에 몽고제국시대가 유목민족 전통의 최극성에 해당한다면, 바로 그 전통이 종료되기도 한 때이다. 몽고 지배자들은 최후의 유목민족 출신 황제들이었다.

 

* 스텦(steppe, 짧은 풀로 이루어진 초원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