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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와 사상의 발생

손경형 2017. 8. 21.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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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사 개설

인간의 역사와 사상의 발생

사상사를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는 항상 문제가 되고 있다. 철학사는 보통 고대철학의 시작을 기원전 6세기의 이오니아에서 발생한 자연학에 두고 있다. 이것은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인데, 왜냐하면 대부분의 학문이 이것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만이 아니라 사상사를 문제로 하게 되면 어떠한 미개한 인간의 생활 속에서도 인간이 의식을 가지고 생활을 하고 있는 한, 거기에는 어떤 형태로든 사상이 있고 사상의 역사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상사의 자료는 명확한 대상으로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있으면 그 기록이나 전승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옛날의 세계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가령 구석기시대의 벽화를 보는 사람은 그 자체 속에서 사상사적 의미를 읽을 수 있다. 또한 구전이나 기록에 의해서 전해진 신화나 전설의 경우에도 과거의 사상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신화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역사 이전의 인류의 생활에서 인류가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는가를 사상사적 문제로 추구하는 경우에는 너무나 많은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을 검토, 정리하고 만족스럽게 그 발자취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역량으로서는 현재로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좁은 의미의 사상사는 이름이 알려진 특정의 개인을 중심으로 그 배경을 살피면서 그것의 의미를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여기서도 우리는 사상이 뚜렷한 형태를 가지고 출현하게 된 사실, 그 자체를 역사적 사실로 파악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또 제약하고 있는 조건의 총체를 찾아보려고 노력하고자 한다.

서구 철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이오니아 미래토스의 자연학자들, 즉 탈레스(Thalēs ; 기원전 624~546)나, 그를 이은 아낙시맨드로스(Anaximandros ; 기원전 611~547),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 기원전 585~528) 등에 있어서 사상이 씨족이나 부족의 공통의 신화로서가 아니라 독창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서 나타나고 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적 창의를 가지고 있는 사상가로서 그들은 반드시 최초의 예가 아니고 동시대에 있어서의 유일한 예도 아니다.

또 탈레스 자신도 동시대의 7현인으로 불리는 사상가 중 하나에 불과하였다. 세계사적으로도 이 시기와 전후하여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나 중국, 인도의 사상가들의 활동도 있었다는 것은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다만 그들 자연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바로 그들의 고찰이 자연을 주제로 했다는 점에 있고 그 고찰의 방법에서 다른 경우보다도 분명하고 결정적인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선 만물의 근본물질(archē)을 탐구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탈레스에 있어서는 물이고 아낙시맨드로스에 있어서는 무한한 것(apeiron)이고 아낙시메네스에 있어서는 공기라고 생각되었다. 그들의 공통된 노력으로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우주의 제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모든 것에 대해 유일하게 최초의 상태를 상정했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러한 것으로서 감각적으로 보이는 자연물의 성질이 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주의 원시상태를 상정했다는 것, 또 그것의 감각적인 물질성을 부여했다는 것만으로서는 결코 창시자라고 할 수는 없다.

많은 신화나 우주창생 이전의 설화 속에서 그러한 견해가 보였던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의 전설이나 설화 속에서는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지 않았고 흔히 말하는 총체적 사고의 상태로부터 탈피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탈레스의 사상을 보면 신화적 의인화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아낙시메네스에 있어서 만물의 생성의 원인이 공기의 농후성과 희박성의 정도라는 양적 변화에 의해 구해지고 있는 경우에 특히 두드러지고 있다. 따라서 이 점에 탈레스 사상의 결정적인 의의가 있는 것이다. 비신화화에 의해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명석하게 고찰한 최초의 시도였으며, 자연을 인간으로부터 분리함으로써 합리적 사고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미개사회에 있어서는 사람들의 식생활이나 그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동식물이 토템으로 되고 있다. 집단과 불가분의 토템은 집단 그 자체와 동일시되고 또 그 집단의 상징, 명칭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이것을 통해서 구성원은 자기가 속하는 집단과 환경사이에 총체적인 일체감을 보유하면서 생활해왔다. 이러한 토템씨족의 인구가 증가하고 다수의 씨족으로 나누어진 대부족을 구성하게 됨으로써 토템의 종류는 필연적으로 증가하고 결국 알고 있는 세계 전체를 포함하는 체계를 만들게 된다. 토템의 계보는 바로 씨족의 계보이기 때문에 여기서 자연과정과 사회과정을 구별하지 않는 우주발생론이 나온다. 이것이 신화이고 총체적 사고의 결과이다.

그러나 신화라고 해도 그것 자체가 자연의 힘을 분류하고 정리한 것이고 동시에 또한 자연의 위협과 은혜 속에서 이루어지는 미개생활에서 집단적인 조직과 질서를 주는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부족적 세계관으로서의 신화는 인류의 의식이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하나의 단계라는 것은 쉽게 이해된다. 나일강 유역에 발달한 이집트나 바빌로니아 등의 고대사회는 물론 부족사회가 아니고 강대한 왕권에 의해 이루어진 거대한 노예국가이고, 놀라운 대규모의 토목기술도 발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발전 속에서 부족적 세계관으로서 성립된 신화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신화적 사고의 틀은 거의 깨뜨려지지 않았는데, 그것은 국왕이 신권을 유지하는 원리로서 국가의 힘에 의해 강화되고 개개인의 의식을 구속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호메로스의 시편을 보면 이 시 속에서 얘기되고 있는 과거의 희랍인의 생활은 부족제도라고 보여지는데, 여기서 개개인은 창의에 충만한 모험가이고 부족회의(agora)에서는 활발한 논쟁이 행하여지고, 부족왕(basileus)의 권력은 왕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그것에 비해서는 적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희랍민족은 이러한 점에서 예외적이었던 것 같은데 이 부족사회가 동양적인 고대전제국가로 이행했더라면 그들의 지성은 고정적인 절대적 권력지배의 타성 밑에서 정체의 늪에 빠졌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희랍본토에 정주하고 기원전 2000년 경 지중해 지역을 무대로 활동을 개시한 이 민족에 있어서는 지리적 조건도 사회사적 조건도 고대전제국가의 성립의 경우와는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우선 희랍인의 생활을 성격지우는 폴리스는 그들이 정주지에서 원주민으로부터 계승하고 또한 건설한 성곽을 기반으로 하는 도시국가이지만 험난한 산지에 의해서 분단되어 있는 희랍반도의 특수한 지형 때문에 분립된 폴리스를 단일의 지배로 통합하는 것이 어려웠고, 식민지에 건설된 것도 비슷한 형의 폴리스였다. 이러한 도시국가의 크기가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강대한 권력지배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자체는 세계 최초의 민중지배 형태가 발전하게 된 조건이었던 것같다.

그리스의 역사는 그 문화적 발전의 관점에서 보아 초기, 중기 및 말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는 그리스 특유의 문화가 점차 성장과정을 밟았던 시대이고, 중기는 기원전 7세기 말 경부터 시작되어 그리스 고유의 문화가 성숙기에 접어든 시기이다. 기원전 4세기 반에 시작되는 말기는 그리스 문화가 어떤 의미에 있어서 세계화한 시대로서 헬레니즘의 시대라는 특징을 갖는다.

처음에 그리스 사회와 로마 사회는 각각 독자적인 경로를 밟으면서 발달하여 각각 특색있는 문화를 형성했지만, 기원전 2세기 중반쯤 로마인이 그리스를 정복한 이후 그리스 문화, 특히 정신적 문화가 로마 사회에 활발히 전입되면서 로마 문화에 획기적인 변화가 초래되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그 민족적 성격이나 민족정신에 현저한 차이가 있고, 그리스 사회 및 로마 사회에서 지배적이었던 사회관 내지 국가관도 그것에 상응하는 각자의 고유한 특색을 갖춘 것이었지만, 서양사상사의 맥락에서 볼 때 그리스 사상사는 로마 사상사에 비하여 훨씬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인이 이론적 사유에 있어서 극히 우수하고 또 학문적 풍토를 존중하는 민족이었던 사실에 연유한다.

모든 학문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철학은 처음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인 사이에서 발생한 후, 그 중심이 그리스 본토의 아테네로 옮겨져 거기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하여 여러 서양철학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것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대두하기 시작했다. 소아시아지방에 거주하던 그리스인 사이에 철학적 사상이 성장한 시대에는 주로 자연의 세계가 철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지만, 철학의 중심이 아테네로 옮겨진 후로는 오히려 인간의 세계가 철학적 사색의 주제가 되었고, 종래 그리스 사회에 존재하고 있던 세속적 사회관과는 내용을 달리하는 여러 사회관이 나타났다.

로마인이 그리스 정복 후 적극적으로 그리스 문화를 흡수할 때, 그리스 철학 특히 그 사회사상이 로마 사회에 전파되면서 로마 철학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론적 사색의 능력이 뛰어난 그리스인이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독창적인 학설을 제창하고 사회사상의 분야에 있어서도 길이 후세의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론적 견해를 남긴데 반해, 그와 같은 능력을 결여한 로마인은 후세에 남을 만한 사회사상을 남기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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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인간의 역사와 사상의 발생 (사상사개설, 1996. 4. 1., 사회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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