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의 역사인식과 개혁사상
목차
(1) 대학자인 동시에 경세가로서의 이이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는 중종 31년 을사사화가 일어나기 11년 전 강원도 강릉 그의 외가에서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사임당신씨(師任堂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매우 총명하여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고, 22세 때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이를 전후해 과거 때마다 장원으로 급제하여 구도장원(九度壯元)이란 칭송을 받았다. 그는 사칠논쟁에 있어서 이황의 리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대하여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내세웠다.
그는 사칠논쟁에 있어서 기대승의 학설을 적극 지지하였으며1) 경세사상에 있어서도 유사성이 많은 것으로 보아 기대승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2) 그러나 이이의 경세사상과 기대승의 경세사상이 다같이 사림들의 참화를 겪고 정암 조광조의 지치주의의 실현이 무산된 공통적 시대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두 경세사상이 전통적 유가의 경세사상을 따른 점에 있어서 유사한 점이 있지만 이이의 경세사상은 현실파악과 역사인식에 있어서 그리고 개혁의지에 있어서 기대승의 경세사상보다 더 강렬하고 적극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이이가 학자인 동시에 경세가로서 호조 · 이조 · 형조 · 병조판서 등의 직무경험을 쌓은 것이 그의 성리학 외에 경세사상을 다채롭고 깊이 있게3)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청주목사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내는 동안 지방장관으로서의 경험도 그의 현실적 경세사상 형성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가 지방장관이나 경세가로서의 높은 지위를 갖기 이전 그의 나이 34세 때 지은 초기의 경세서인 「동호문답(東湖問答)」에 이미 현실 개혁적 경세사상이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그의 경세사상이 단지 경험을 통해서만 얻어진 것이라 기보다는 동시에 역사와 현실을 꿰뚫는 직관력과 통찰력을 갖춘 혜안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칸트가 예술활동을 전연 하지 않았지만 미학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살필 수 있을 것 같다.
이이는 유가의 전통적 경세사상을 받아드리면서도 누구보다 더 현실상황 시대인식에 투철하였으며 특히 역사인식에 있어서는 역사의 동인을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두고 시대의 변혁을 주도하려는 열의를 보였다. 그리고 그는 실공(實功)과 실효(實效) 및 무실(務實)을 중시하여 그의 개혁 의지가 비록 유가경세사상의 목표인 왕도정치의 이념에 기초하였다고 하더라도 보다 현실적 구체적 개혁에 초점을 맞춘 점에서 전통적 유가경세사상보다 더 역동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비추어진다.
여기에서는 이이의 역사인식과 개혁의지를 살펴보고, 그의 초기의 작품인 「동호문답」으로부터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경연일기(經筵日記)」, 「격몽요결(擊蒙要訣)」과 각종 소(), 계(啓), 차(箚), 의(議), 책(策) 등을 통하여 그의 경세 사상의 대요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역사인식
이이는 조선조가 개국한지 대략 150년에서 200년 사이에 활동하였는데 이 200년은 이이의 역사적 시대 구분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조선조는 이 시기에 세종, 세조, 성종의 치세를 지나 무오 · 갑자 · 기묘 · 을사의 사화를 거치면서 사림들의 참혹한 재앙을 겪어 여론 형성의 주체이며 정치활력의 원천이었던 지식계급이 무너졌고, 정치 · 사회 · 경제 · 국방 등 여러 분야에서 구법의 폐단으로 말미암아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특히 연산군의 폐륜과 그에 뒤따른 반정(反正) 등은 재정파탄 및 공신과 사림 등의 갈등을 더욱 조장하였다. 거기에다가 유가의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정암 조광조의 지치주의의 무산은 많은 사림들의 좌절과 개탄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기대승과 이이와 같은 경세사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이는 그의 경세사상의 변혁의 논리를 200년이라는 시대적 구분에 두고 전개시키려고 한 점에 있어서 독특한 점이 있다. 맹자는 역사적 변혁기간을 500년으로 설정했지만, 이이는 그것을 200년으로 잡고 있다. 그가 이렇게 맹자의 역사변혁기간을 500년에서 200년으로 단축한 이유에 대하여 다음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할 수 있다. 첫째, 이이의 시대와 맹자의 시대에 있어서 역사 발전 템포의 차이, 둘째, 현실인식을 통한 변혁의 당위성에 대한 심각성의 차이를 생각할 수 있다.
이이는 역사 발전 속도의 측면에서 역사 변혁의 시기를 200년으로 상정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이와 맹자가 다같이 역사발전이 완만한 농경사회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이의 경세사상의 기저에는 맹자의 왕도정치의 이념이 들어 있으며 따라서 그가 맹자의 역사 발전의 패턴을 의도적으로 이탈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이의 역사변혁 시기의 설정은 두 번째 관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이는 그의 관직생활 초 1568년 그의 나이 33세 때 춘추사서장관(春秋使書狀官)으로서 북경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 때 이미 서양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거주하면서 활동하였으므로 그가 서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식을 가졌으리라고 생각되며, 또한 이 무렵 만주에서는 여진족 누르하치가 활동하기 시작하였으므로 어느 정도 여진족의 동태를 파악했으리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15세기 이후 포르투갈 등이 중국 및 일본에 쳐들어온 사건 등은 그에게 어떤 절박한 시대상황과 불안한 역사인식을 갖게 했을 것이다.
이이는 그 당시의 국제적 상황을 남쪽의 왜(倭)와 북쪽의 호(胡)의 동태를 여러 채널을 통해서 듣고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국방 개혁과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다. 한편 그는 국내에서 일어나는 니탕개(尼蕩介)의 난과 같은 내란, 국민생활의 피폐와 재정의 고갈, 세정 및 군정의 문란, 관료의 부패와 기강의 해이 등4) 을 스스로 경험하였고 그가 당시의 국가를 한나절도 채 버티기 힘든 건물로 비유한 것5)으로 보아 누구보다 국가 존망의 위기 상황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인식으로부터 개혁의 정당성과 절박성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현실인식을 통한 그의 개혁 건의의 정당성과 절박성을 선조에게 주지시키기 위해서 역사의 변혁시기를 맹자의 500년에서 200년으로 단축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이는 이처럼 역사의 변혁 시기를 중국의 전통적 변혁시기인 700년 또는 500년을 200년으로 단축하고 그것을 창업과 수성과 경장으로 세분하고6) 있다.
우선 그가 역사의 변혁 시기를 200년으로 잡고 있는 몇 개의 진술을 살펴보자.
“예로부터 치국이 중엽에 이르면 반드시 안일에 빠져 국세가 쇠약해지는 것입니다 ···. 지금은 조선조가 건국된 지 200여 년이 지나 중쇠기이니 이때가 바로 천명을 지속시킬 때인 것입니다.”7)
“우리 나라 조종들이 입법을 하던 처음에는 물론 극히 빈틈없었던 것이나 200년이 지나는 동안 때도 바뀌고 일도 변화하여 폐단이 없지 않게 되었으니 잘 변통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하물며 후일에 제정된 그릇된 법규야 마땅히 불에 타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듯 서둘러 개혁해야만 되지 않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궁하면 변화되고 변하게 되면 통해진다’고 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변통해야 하는 까닭을 생각해 보소서.”8)
이이는 이처럼 역사변혁의 시기를 200년으로 보고 있으며 당시야말로 변혁의 시기로서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는 이처럼 역사에 있어서 맹자의 일치일난설(一治一亂說)9)의 모델을 답습하면서도 맹자의 흥망성쇠의 500년 주기설10)을 따르지 않고 있지만, 맹자의 일치일란설과 흥망주기설에 따라 역사순환설을 신봉하고 있는 점에 있어서는 일치한다.
중국인의 역사관은 대체로 역사순환사관으로서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것으로서 역사자체의 목적이나 발전을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인들의 이러한 역사에 대한 태도 때문에 중국의 경우 역사기록의 풍부성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의 사유 속에는 역사철학이 끝내 생겨나지 못했으며 역사의 흐름을 관통하는 원리라든가 역사의 방향에 대한 사고도 싹트지 못했다고 평하는 학자도 있다.11) 그러나 순환론적 역사관이 모두 비역사철학적 태도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순환론적 역사관도 과거를 죽은 과거로서가 아니라 현재에 교훈을 제공하는 산 역사로서 재연된다는 점과 인류역사를 보편사로 간주한다는 점, 숙명론적 결정론적 역사철학인 헤겔이나 마르크스 등의 역사철학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은 역사자체의 목적이나 의도 또는 발전방향을 설정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점에 있어서 그들과는 또 다를 역사철학적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마르크스도 공산당 선언에서 노동자의 단결과 변혁의지가 세계변혁의 주역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동양의 순환론적 역사관에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것과 같은 입장이다.
이러한 순환사관은 역사 속에서 교훈을 찾으려고 하는 동양인들만 가진 것이 아니라 고대 희랍인들도 순환사관을 가지고 있다. 역사에서 교훈을 찾으려는 동양의 순환사관은 ‘극에 달하면 반전한다’는 기본적인 순환의 논리를 기본으로 하는 『주역』에 그 논리근거를 두고 있다.
콜링우드도 희랍의 순환사관에서 인간의 의지가 작용하는 것을 찾아내려고 했으며 그러한 인간의 의지를 높이 평가했다.12) 중국인들의 순환사관도 또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고 중용의 교훈을 얻어 역사로부터 가치를 찾으려는 점에 있어서는 일치한다. 그리고 그러한 순환사관은 중국의 역학사상에 내포된 역사의식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13)
이이의 역사인식도 중국인들처럼 순환사관을 그 근저에 가지고 있다. 이이는 역학의 변화논리에 따라 역사변화의 패턴을 설정했지만 역학의 기본정신에 따라 인간의 의지14)를 강조함으로써 역사의 필연성이나 숙명론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이점에서 그의 역사인식은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역사관에서 보여주고 있는 인간의 의지와는 독립된 변증법적 발전사관과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이는 『동호문답』에서 비록 그것이 통감류의 교훈적 역사인식이긴 하지만 역사에 대한 해박한 이해와 투철한 반성을 보여주고 있다. 송익필(宋翼弼)도 “이이는 『소학』을 공손히 믿고 『근사록(近思錄)』을 존숭하고 한편으로는 사서에 두루 통달하고 모든 경서의 뜻을 발휘했다”15)고 하여 이이의 역사에 관한 해박한 이해를 가지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이는 또한 「역수책(易數策)」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주역』에 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역학(易學)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의 주저인 『성학집요』에서도 역(易)에 관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으며, 특히 변혁 경장을 건의하는 상소문들의 도처에서 역(易)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이는 이와 같은 역사적 지식과 역학에 관한 지식을 통하여 그의 변혁과 경장의 논리를 상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이는 역사 진행 패턴으로서의 창업 수성 경장의 논리를 제기하고 그 정당성의 근거를 유가 경전 특히 『역경』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역(易)은 변혁의 논리로서 그것을 풀어서 말하면,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16)는 뜻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궁(窮)은 ‘가득참’ 또는 ‘극에 달함’을 의미한다.17)
이러한 『주역』의 극에 달하면 반전한다는 논리는 이것을 자연에 적용하면 자연에는 음이 점점 커져서 극에 달하면 양이 되고, 양이 점점 커져서 극에 달하면 음이 되어, 생성변화의 순환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유가적 우주론의 근거가 되며, 역사에 적용하면 역사의 흥망성쇠가 순환 · 반복된다는 역사순환론이 된다. 그러면 이이는 역사 패턴을 조선조의 역사에 어떻게 적용했을까?
이이는 역사를 창업 · 수성 · 경장의 순서로 진행하는 것으로 보았지만 조선조에 있어서 창업기 · 수성기 · 경장기를 확연하게 구분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동호문답」에서 “우리 태조는 왕씨의 쇠운을 이어서 신무(神武)로써 왕운(王運)을 받은 분이시고, 그 계통을 이은 임금 가운데 세종이 계시는데, 세종 같은 성인은 전조에는 없었습니다. ··· 우리 나라의 만년의 복조(福祚)는 세종에서 처음으로 기초가 마련된 것입니다”18)라고 한 것으로 봐서 조선조의 창업기를 태조 혹은 태종 또는 세종까지로도 볼 수 있게 했다.
그것은 태조가 조선조를 직접 창업했지만 태종도 여기에 직접 참여했고 세종에 의하여 여진족과 왜를 처서 국가의 경계를 확정하고 변방의 환란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다음 수성기에 대해서 그는 성종 혹은 중종까지로 설정할 것인지에 관한 명확한 설명이 없다. 이이는 성종과 중종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19)으로 봐서 중종까지를 수성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종 반정 이전의 연산군의 폭정을 수성기에 포함시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경장기는 연산군의 폭정기간과 사대사화를 거치면서 국력이 소진되고 재정이 파탄에 이르고 기강이 무너져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이이 당대를 의미한다. 이이가 그의 시대를 경장의 시대로 파악한 것은 시대인식 내지 현실인식에서 온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20) 조선조를 자기 당대에 이르기까지 창업기 · 수성기 · 경장기로 분류한 것은 『주역』의 순환론적 사고유형을 모델로 하여 당대의 절박한 현실을 타계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이는 역사와 『주역』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통하여 역사자체를 변역의 논리인 순환론적 과정의 일환으로 보고 창업 · 수성 · 경장의 과정으로 설명했으며, 경장은 제2의 창업, 제2의 건국으로 이어져 역사는 끊임없이 순환 지속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가 변화의 원리를 파악한 토양은 국가존망의 절박한 현실인식이었다. 그러한 인식 위에 그는 현실타파적 개혁의 필연성과 절박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역사자체의 법칙을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렇게 역사의 순화법칙을 강조했지만 숙명론에 빠지지 않고 50여 차례에 걸친 건의를 통하여 현실타파적 개혁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그가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점은 역사에 관한 마르크스와 같은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본래적 의도 역시 군주의 개혁의지를 통한 세계의 변혁에 있었으며, 역사의 결정론은 다만 변혁을 위한 수단, 즉 변혁의 정당성과 절박성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에 있어서 역사 인식은 현실 개혁을 위한 선행조건이면서도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3) 개혁의지와 그 형이상학적 근거
이이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국가존망의 위기상황으로 진단하고 있다.
“지금 백성은 흩어지고 군사는 쇠잔하여졌으며, 창고는 텅 비어 있고 은혜는 아래에 미치지 않고 신의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만일 외적이 변방을 침범한다거나 폭도들이 무장하여 반항한다면, 막을 만한 병력과 먹을 만한 군량이 없으며 유지할 만한 신의가 없습니다. 근심에 젖은 백성들은 항상 도탄에서 허덕이면서 호소해도 위에 들리지 않으니, 외적의 침입이 없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위태로운 상황인데, 하물며 지금 북방의 호족(胡族)이 우리와 틈이 벌어져 병화(兵禍)가 연결되었음에랴. 구원하자니 나라에 병사가 적고 군량을 공급하자니 창고에 묵은 저축이 없으며 느슨히 하면 해이하여 이루어지지 않고, 급히 서두르면 무너져 흩어져서 도둑이 됩니다. 이와 같이 국난과 멸망의 현상이 환히 목전에 있으니 이는 ‘일이 있기 전에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곧 ‘구제하려 해도 소용이 없는 것’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위태하고 위태하옵니다.”21)
“근래의 정치가 문란하고 관리들의 수탈이 가혹하여 각종 부역이 번중한 데다가, 기근이 거듭 들고 전염병이 계속 일어나서, 젊은이는 사방으로 흩어지고 약자는 구렁텅이에서 허덕이며 큰소리로 울부짖는 백성들은 물위에 뜬 풀과 같아서, 고을과 마을이 모두 비었고 밭과 들은 황무지로 되었으며 100리 안에는 인가의 밥짓는 연기를 볼 수 없으니, 그 기상이 비참하고 처량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22)
“전하께서는 적폐의 뒤를 이으셨으니 마땅히 경장을 강구하셔야 할 것인데 매양 변법(變法)을 어렵게 여기시기 때문에 변통해야 한다는 진언이 채택되지 않는 것입니다. 비교하자면 마치 오래된 집에 재목이 썩어 무너지려 하는데 기둥이나 서까래 하나 바꾸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집이 무너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23)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이는 국가의 위기상황을 진단하고 국왕이 국가의 위기상황에 처하여서도 개혁의지를 보이지 않자, 이이는 개혁만이 국가가 살 수 있으며 개혁하지 않으면 국가는 반드시 망한다고24)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다.
이이는 개혁만이 국가가 망하는 것을 방지하는 길임을 역설하고 임금의 개혁의지를 수 차례 촉구했으나 선조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이는 비장한 심정으로 개혁의 성과가 없으면 자기가 중죄를 받겠다고25)까지 했다. 이이는 당시의 시대가 개혁을 필요로 하는 경장기임을 일깨우고 개혁을 통한 태평성대로 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혼란으로 갈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고26) 하여 군주의 개혁의지를 촉구했다.
이이는 군주가 성군(聖君)이 되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하고27) 당시에도 삼대(三代)의 치세를 실현할 수 있다고28) 했다. 그리고 그는 역사의 치란은 전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에 달린 것이라는 정자(程子)의 말을 인용하고29) 선조께 큰 뜻을 일으켜 지치(至治)를 실현하도록 간청했다.30) 그리고 그는 군주가 지치에 대한 입지가 있고 그에 대한 실천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군주 혼자의 힘만으로는 그것의 실현이 어렵고 그를 보좌하는 현재(賢才)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31)
이이는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가 존망의 기로에 처하여 국가를 살릴 수 있는 길은 개혁뿐이라고 보고 있다. 이이는 이러한 개혁의 당위성과 더불어 상하가 모두 개혁의지를 가져야 하고 국민의 인습적 사고방식을 고쳐야 한다32)는 일종의 의식개혁을 역설했다. 이렇게 개혁의 당위성을 역설하면서도 개혁의 속도에 관하여는 급진적 개혁보다는 점진적 개혁을 주장했다.
이러한 의식개혁과 점진적 개혁은 주자의 <무신봉사(戊申封事)>의 모델을 따른 것으로서 기대승의 『논사록(論思錄)』에서 주장하는 개혁도 이 점에 있어서는 예외는 아니다. 이처럼 그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여 군주의 개혁의지와 현명한 신하의 보필만이 국가를 구할 수 있는 길임을 역설했다. 그러면 그의 경세론에 있어서의 개혁의지의 형이상학적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이의 경세론은 현실인식을 통한 개혁사상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개혁 경장 변통 등은 모두 변역의 논리에서 온 것으로서 역사나 현실세계가 변화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개혁사상은 그의 성리학에 있어서 의(意)와 지(志)에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의(意)’란 ‘정(情)’이 움직인 후에 정에 연(緣)하여 계교하는 것이라고도 하고33) 심(心)이 느낀 바에 의하여 상량(商量)함을 의미한다.34)
한편 지(志)란 의(意)의 계교상량(計較商量) 작용을 거쳐 심(心)의 가는 바의 방향과 목표가 있는 것으로서 선악 · 시비 · 호오(好惡)가 이미 정해진 것이다.35) 이와 같이 이이에 의하면 의와 지는 정이 발하여 계교상량작용을 하는 심의 작용으로서 변화에 대처하고 변화를 주도하는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가 비록 주의철학을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의(意)와 지(志)의 중시사상은 그의 개혁사상의 형성과 실현에 있어서 형이상학적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한 그의 인심도심설에 있어서도 주희나 이황과는 달리 인심도심의 불변성이나 상호 묘맥이 있음을 부인하고36) 도심이 인심으로도 되고 인심이 도심으로도 될 수 있는 상호가변성을 인정했다. 즉 그는 인심이라도 기의 용사(用事)를 정찰하여 정리에로 나아가면 인심이 도심의 명령을 들어 도심으로 바뀌고 그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사의가 개입되면 도심이 인심으로 바뀐다고 하여 시폐를 혁파하여 개선할 수 있다는 가능근거를 제공했으며, 이러한 상호가변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의(意)의 계교상량작용이라고37) 했다.
이이에 있어서 역사의 치(治)와 난(亂)을 도심과 인심의 조응으로 볼 때, 그의 인심도심설의 상호가변성을 가능케 하는 의와 지의 기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퇴계처럼 인심도심설에서 인심과 도심의 상호가변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난세를 치세로 바꿀 수 있는 변혁에 관한 형이상학적 근거를 제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의지중시의 사상과 인심 도심의 상호가변성의 인정이 그의 사회개혁사상의 형이상학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이이의 이러한 성리학의 특성 외에도 그의 주기론적 철학경향이 그의 경세론에 있어서 개혁중시의 사상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일반론이긴 하지만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왜냐하면 주기론자가 모두 개혁에 찬동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이에 있어서 개혁 · 경장 · 변통 등은 변역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변혁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며 인간의 심리적 기능 가운데서도 의지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4) 이이의 경세사상의 내용
① 현재(賢才) 등용과 인사개혁
현재등용의 중요성38)은 정자(程子) 이래 유가경세사상에서 가장 중요시되어 왔다. 그것은 정치가 군주 혼자의 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보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이는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군주가 지치에 대한 입지가 있고 그에 대한 실천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군주 혼자의 힘만으로는 그것의 실현이 어렵고 그를 보좌하는 현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39) 그래서 그는 ‘현재를 등용하여 조정을 맡게 하는 것’40)을 그의 정치사상의 기본41)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이이는 현재를 등용하기 위해서는 기대승이 『논사록』에서 주장한 것42)처럼 시(是)와 비(非), 사(邪)와 정(正), 군자와 소인을 분별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43) 그리고 군자를 등용하려면 우선 그의 말을 들어보고 그의 행동을 관찰하여 그 간사함과 정직함을 판별해야 한다고 한다.44) 이이는 「동호문답」에서 ‘간신을 변별하는 것이 현재를 등용하는 요체가 된다’는 장을 설정하여, 간신을 멀리 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군자와 소인은 물과 불이 같은 그릇에 같이 있을 수 없고 어름과 숯이 서로 같은 류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아서 이것이 자라면 저것이 사라지고, 저것이 성하면 이것이 쇠하니, 옛날의 임금들도 군자를 내세워 쓰고 소인을 물리쳐 배척하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지만 군자가 임금을 만나 등용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임금이 비위를 맞추는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45) 이이는 그의 「성학집요」 <용현장(用賢章)>에서 군자와 소인에 관하여 수천어로 고전과 그 주석을 들어 설명하고 있으나 일반론에 그치고 있으며, 그의 개혁적 경세론에 합당한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에 관한 언급은 없다.46)
다만 <간원진시사소(諫院陳時事疎)>에서 그는 정사와 관련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이 양자를 구분하기를, 군자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진퇴가 분명한 사람, 임금의 희노에 개의치 않고 옳은 것을 말하고 간사한 것을 막으려고 하며, 홀로 행하되 세속에 더렵혀지지 않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공평무사하며, 착한 무리들을 끌어들이고 도맥(道脈)을 진흥시켜 조정에 많은 선비들이 성하게 하려는 사람인데 반하여, 소인은 한갓 녹만을 구하여 자리에 연연하며, 국사에는 별로 걱정하지 않고 임금의 비위나 맞추면서 총애나 녹만을 견고히 하려고 하며, 이익만을 추구하고 세력에 아부하고 자기의 방향을 정하지 못하며, 마음 쓰는 것이 음험하고 깊은 함정과 기밀이 많으며 출세하기 위하여 말을 조작하여 일을 만들어 선량한 사람들을 법망에 끌어넣어 남을 해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47)
그가 말하는 군자라는 계층은 바로 사림파이다. 사림파는 주자학의 ‘수기치인’을 실천하는 절의파로부터 시작하여 중종반정이후 조광조(趙光祖), 김안국(金安國) 등을 중심으로 새롭게 결집된 성리학자들로 구성된 지식계급으로서 훈구세력과 맞섰던 세력들이다. 이들은 훈구세력과 갈등을 빚어 훈구세력의 위훈(僞勳) 삭제사건을 계기로 훈구세력의 반격을 받아 기묘사화(1519)를 맞게 되어 일망타진되었다.
그러다가 중종 말년에 이르러 사림들이 정계에 재등장하면서 활동이 점차로 활발해졌으나 인종원년(1545)의 을사사화와 명종2년(1547)의 정미사화에 또 한차례의 타격을 받아 잠시 소강상태를 맞았으나 명종20년(1565) 문정왕후의 죽음과 윤원형(尹元衡)이 축출된 후에는 결국 사림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사림시대가 열렸다.48) 그러나 아직까지도 사림들은 여러 차례의 사화에 대한 위구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분위기가 지속되어 사림들이 출사를 꺼려하였다.
그래서 기대승도 사림들이 안심하고 출사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을 위하여 사화에 연루되어 처벌된 사람들을 신원(伸寃)해주고 조광조 · 이언적(李彦迪) 등을 표창해주어야 한다고 1567년(선조 원년) 선조에게 건의하고 한편 윤원형 · 이기(李芑) 등을 공격하였다.49) 이이 역시 기대승과 같은 시각에서 사림파가 여러 차례의 사화를 거치면서 두려워하고 조심하며 구차히 살아가는 것만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국사의 전면에 나서지 못하게 된 것을 개탄하면서50) 사림파를 옹호하고 조광조를 높이 평가하는 한편 윤원형에게 벌을 주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51) 이이는 사림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마음으로는 옛날의 도를 흠모하고 몸으로는 유가의 행위를 하며 훌륭한 말만을 하면서 공론을 지키는 사람을 사림이라 한다. 사림이 조정에 있으면서 사업을 잘 베풀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사림이 조정에 없어 공소한 말만 일삼으면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이니 예로부터 군자와 소인의 진퇴에 치란(治亂)이 달려있는 것이다.”52)
“옛날부터 국가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사림이니, 사림은 국가의 원기(元氣)이다.”53)
이이는 이처럼 사림을 공론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볼뿐만 아니라 국가의 원기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수기 치인’을 근본으로 삼는 절의파를 중심으로 형성된 사림계층을 군자의 소속계층으로 보는 성리학적 기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어진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를 위임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날부터 밝은 군주는 홀로 다스리지 아니하고 반드시 어진 인재를 얻어서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요임금도 순임금을 얻지 못할까를 걱정하였고 순임금도 우(禹)와 고요(皐陶)를 얻지 못할까를 걱정하였으니 임금이 신하에게 맡기는 것은 천지의 도입니다. 다만 맡기는 것에 사와 정이 있어서 치란(治亂)과 안위(安危)가 여기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군자에게 맡기면 정사가 다스려져서 태평하고 소인에게 맡기면 정사가 천단되어 위태하며, 군자나 소인에게 간에 모두 맡기지 않으면 정사가 흩어져 어지럽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54)
그는 이처럼 현재를 등용하여 그에게 정치를 위임하여야 한다고 하여 기대승과 같은 입장을 취했지만 기대승처럼 책임정치를 역설하지는 않았다. 그에 의하면 현재를 찾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사림들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사화로 인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꺼린다고 보고55) 과거제도만으로는 불충분하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천거제(薦擧制)를 보다 널리 활용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이처럼 천거제를 주장하고 선호하면서도 공평한 천거를 위하여 조종 신하로 하여금 청렴하고 유능하며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가려서 천거하도록 하고 천거된 자가 악정을 베풀면 본인은 물론 추천한 자까지도 연대하여 죄를 받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56)
이이는 천거제의 활성화를 위하여 선조 즉위 직후 이조판서 이탁(李鐸)의 건의로 시행되기 시작했던 학생공천법(學生公薦法)을 선조가 폐지하려고 하자 이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선조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그러한 규정이 없다고 하여 그것을 폐지할 것을 명하여 폐지하고 말았다.57) 이이는 또한 천거에 의하여 관직에 진출한 사람들의 활동을 제약하는 규정인 과거출신이 아니면 대관(臺諫)이 될 수 없게 되어 있는 규정을 삭제할 것을 여러 차례 건의하였다.58)
이러한 이이의 주장은 선조 7년 받아드려 시행되었지만, 선조 16년 시행이 번복되었다. 이이의 이러한 천거제에 대한 선호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분적으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 유능하고 유덕한 인재를 등용하여 활용하자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으나 관직사회의 분위기 쇄신이라는 측면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한 통치기구 특히 지방통치기구의 축소59)와 관직과 관리의 수를 줄일 것을 주장했는데,60) 이것은 관료사회의 무사안일 풍조를 일소하고 무능한 관리들을 도태시키며,61) 통치기구의 효율성을 높이면서62) 백성의 부담을 줄이려는 의도63)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이의 지방 통치기구의 축소건의는 선조에게 일부 받아들여졌으나 이이의 죽음으로 인하여 시행되지 못했다.64)
이이는 이 밖에도 인재등용에 있어서 청탁배제65)와 국민 여론중시66) 등을 제시하고 있으며, 승지 등 시종이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의 부당함을 지적하고67) 있다. 그는 또한 관직과 관리의 수를 줄이는 대신, 지방장관(감사(監司))에게는 그 직책을 오래도록 맡겨 통치해야 하고,68) 그 대신 수령에 대한 감독을 철저히 하고,69)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이이는 또한 그 당시의 사회적 인식처럼70) 정사에 있어서 외척의 배제71)및 왕의 장인 축출72)을 건의했다. 이것은 정치에 있어서 모든 장애요인을 제거하여 조정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요컨대 이이는 인사문제에 있어서 어진 인재를 발굴 등용하여 군왕의 지치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그의 경세사상의 근본으로 삼았다. 어진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관리채용방법인 과거제도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추천제와 같은 방법이 보완되어야 하며, 고급관리 채용에 있어서 요즈음 거론되고 있는 인사청문회와 같은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관서를 감소하여 무사안일한 관리들을 도태시키고, 통치기구의 효율성을 높이고 백성의 부담을 줄이자고 했다.
또한 이이는 내직보다는 백성들과 직결되는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혜택을 줄 수 있다고 본73) 외직을 중시했다.74) 그는 또한 감사의 직무기간 1년은 너무 짧다고 하고 중국의 경우 10여 년 이상 재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하면서 그 임기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대신 무사안일을 방지하고 부정부패를 예방하기 위하여 수령에 대한 감사를 철저히 해야한다75)고 했다.
그리고 그는 정사에 있어서 외척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유가의 경세사상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항으로서 조선조 초기 정도전으로부터 강력하게 시행되어 온 사항이긴 하지만 조선조 중기에 들어오면서 그것이 지켜지지 않고 오히려 그 폐해가 커지자 조식과 같은 사람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러한 외직중시와 감사의 기능을 강화하자는 이이의 주장은 선조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선조가 지방세력의 대두를 우려했기 때문이다.76)
이이의 경세론에 있어서 어진 인재 등용과 같은 인사문제는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첩경이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이에 있어서 어진 인재라 하더라도 다만 군왕의 입지가 전제되어야만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군왕이 시폐를 구할 뜻이 없다면 옛날의 고요(皐陶), 직(稷), 설(契)과 같은 명신(明臣)이 좌우에서 보필한다고 하더라도 무익하다고 했다.77) 이러한 생각은 비단 이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군주정치를 전제로 하는 유가경세사상의 공통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② 국가기강의 확립과 언로의 확장
이이는 국가위기상의 원인으로 부정부패, 국가재정의 피폐, 폭렴(暴斂)으로 인한 빈부의 격차와 민심의 이반, 군정의 문란, 국가기강의 해이 등을 들고 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국권이 확립되지 않고 조정의 기강이 흩어져 마치 주인 없는 집에 길가는 사람들이 마구 들어와 떠들어대는 것과 같다고 하며 심지어 초동목수(樵童牧竪)나 젖내나는 어린아이들까지 정부의 비판에 끼어 들어 조정이 엄하지 못하고 정치가 부의(浮議)로 인하여 어지러워지고 있다고 한다.78)
그러므로 국권을 확립하고 국가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는 국가의 기강을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79) 그는 기강을 ‘국가의 원기(元氣)’80) 또는 ‘국가의 명맥(命脈)’81)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여 기강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이는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기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고 기강이 정숙해지는 것은 법을 준수함에 있으며 법이 잘 시행되지 않으면 기강이 반드시 무너진다고 한다.82) 이이에 있어서 이처럼 법의 준수가 기강확립의 필요요건임에도 백성이 법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법이 시의(時宜)에 맡지 않는 폐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이이의 변법개혁의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법과 제도의 개혁에 관한 논의는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폐법개혁과 관련되는 언론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이이에 의하면 폐법을 개혁하고자 하면 언로를 넓혀 선책(善策)을 모아야 한다고 한다.83) 그렇게 함으로써 국민의 의사를 파악하여 최선의 법제를 만들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민의 의사표출이 곧 공론(公論)이다. 이이에 있어서 공론이란 ‘사람들이 다함께 동의하는 것’84)으로서 ‘국가의 원기를 지닌 것’85)이다.
이 공론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막을 수 없으며, 이것의 반응에 순응하여 국시(國是)가 정해진다고86) 한다. 그리고 이이는 공론이 조정에 있으면 그 국가는 잘 다스려지나, 그것이 다만 백성들에게만 있을 때에는 그 국가는 어지러워지며 양쪽에 다 없으면 그 나라는 망한다고 한다.87)
이렇게 공론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며 국가존망에 관계되는 국가통치의 원동력이라고 보는 견해는 맹자의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민본사상에 연원을 둔 것이긴 하지만 국시가 여론의 반응에 따라 정해진다는 생각은 오늘날의 여론정치를 예견한 탁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이의 이러한 공론관에는 공론과 단순한 다수 의견인 여론과의 구별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공론은 다수 의사라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요 정당성의 문제라고 하여 여론과 구분하고 학자도 있지만88) 이이는 이러한 구별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공론과 반대되는 일반여론을 부의(浮議)라 하여 경계하고 그 힘의 위대함과 폭발성에 관하여는 언급하였지만 그것이 발생하는 원인에 관하여는 알 수 없다고 하였으며, 공론의 정당성을 심의하여 가릴 수 있는 기준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른바 부의라는 것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알 수 없으며 처음에는 미약하지만 점차 성하여져 묘당(廟堂)을 동요시키고 대각(臺閣;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뒤흔들게 되면 온 조정이 이에 휩쓸려 감히 막아내지 못한다. 부의의 힘은 태산보다도 무겁고 칼날보다도 날카로워서 그에 한 번 부딪히면 공경(公卿)도 그 존귀함을 잃고 현준(賢俊)도 그 명예를 잃는다. 장의(張儀)나 소진(蘇秦) 같은 사람의 웅변도 소용이 없고 맹분(孟賁)이나 하육(夏育) 같은 사람의 용맹도 베풀 바가 없으니 끝내 그 까닭을 알지 못한다.”89)
그러면 일반여론과 공론을 구분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여기에 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이는 사림과 공론을 다같이 국가의 원기라고 보고 있으므로 사림이 공론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주체라고 보고 있는 것 같다. 이이에 의하면 사림은 국가가 믿고 의지하는 국가의 원기로서, 사림이 성하고 화합하면 그 국가는 잘 다스려지지만 사림이 과격하고 분열되면 그 나라는 어지러워지며 사림이 실패하여 다 없어지면 그 나라는 망한다는 것이다.90)
이처럼 이이는 사림이 국가기강 및 공론을 지키고 그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주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에 있어서 사림이란 마음으로는 옛날의 도를 흠모하고 몸으로는 유가의 행위를 하며 훌륭한 말만하며 공론을 지키는 사람을 뜻함으로91) 그의 언론관은 정통적 유가경세론에 입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 이이의 기강, 공론, 사림에 관하여 살펴보았는데, 이것들은 사회규범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서 그에 의하면 국가의 원기가 되는 것이다. 이 삼자의 관계에 관하여, 금장태는 질서의 기준이 기강이라면 그 논리가 공론이요 그 담당자가 사림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92) 이것은 기능 및 역할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삼자의 관계를 발생의 측면에서는 볼 때 여론의 발생(이이는 그 원인은 알 수 없다고 함), 공론화 과정, 사림의 개입, 조정의 공론수용, 국가 기강의 확립이라는 순서로 진행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있어서 국가는 공론을 잘 받아들여 국가 통치를 잘 이루려면 언로의 개방93)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이 점에서 그는 조광조의 언론관을 철저하게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③ 제도개혁과 경제사(經濟司) 설치
이상에서 언급된 현재등용과 언로확장 문제는 유가경세론에서 일반적으로 중시되는 공통적인 관심사항으로서 이이도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문제를 중시하였지만 그의 경세론의 특징은 개혁사상에 있다. 현실인식에 바탕을 둔 실공 · 실효 · 무실을 강조하는 그의 개혁사상은 정자의 <논십사차자>94)나 주자의 <무신봉사>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그가 <성학집요>에서 <논십사차자>를 삼대의 치세를 회복할 수 있는 탁론이라고 인용한 것과 그의 <만언봉사>의 내용이 <무신봉사>의 그것과 유사한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비록 그들의 개혁사상을 참작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개혁사상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한국적 토양에 맡게 계승 발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개혁사상에는 조선조의 특이한 역사인식과 현실상황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강렬한 개혁의지를 가지고 수십 차례의 개혁을 건의한 그 열의가 돋보이며, 제도 및 현실적 폐단을 개선할 개혁주도 관청인 경제사 설치를 건의한 것 등의 현실 대안 능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이이는 선조 14년(1581년) 경제사 설치를 건의하였지만 이전부터 경장에 부정적 태도를 보이고 개혁이 어렵다는 입장을 보여왔던95) 선조는 이 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이는 당대를 개혁을 해야 하는 경장기로 규정하고 경장하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에까지 이를 수 있음을 경고하고,96) 때가 되면 일도 바뀌고 법도 바뀌어야 한다고 하여 정치 경제 인사 교육 국방 등 다방면에 있어서 변법 경장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개혁에 있어서, 첫째, 시의에 맞게, 둘째, 교화를 통하여, 셋째, 공론을 중시하면서, 넷째, 점진적으로, 다섯째, 군주의 자발적 개혁의지를 불러 일으켜서 해야 한다는 기본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른바 시의(時宜)라고 하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하고 법을 만들어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말한다. 정자는 『역』을 논하여 말하기를, ‘때를 알고 형세를 아는 것이 『역』을 배우는 큰 방도이다’라고 하였고, 또 ‘때에 따라 변역(變易)하는 것이 불변의 상도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법이란 때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니 때가 바뀌면 법도 같지 않게 되는 것이다.”97)
“전하께서는 특별히 의견을 구한다는 전교를 내리시고 거리낌없이 문호를 크게 열어 놓고 위로는 조정의 신하들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안으로는 서울에서 밖으로는 먼 변방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각각 현재의 폐단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그들의 참뜻을 다 털어놓기에 힘쓰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이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언로를 개방하여 의견을 개진케 하고 그들의 선책(善策)을 시정에 반영해야 한다고 한다.
다음으로 이이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혁은 급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점진적으로 행해져야 한다고 한다. 그것은 송유(宋儒)들이 왕안석(王安石)의 급진적 개혁의 폐해를 겪은 후에 급진적 개혁에 반대하였으며 특히 주희가 그의 ≪무신봉사(戊申封事)≫에서 급진주의를 사이비로 규정한 후, 전통적 유가경세론에서는 급진적 개혁을 반대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 이었는데 그도 이러한 경향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는 개혁에 있어서 군주의 자발적 의지를 중요시하고 여러 곳에서 삼대의 치세를 실현하려는 군주의 입지를 강조했으며, 조광조의 개혁실패도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지 않은 것이 여러 실패의 원인 가운데 가장 큰 원인으로 삼았다.
요컨대 그는 제도개혁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그것을 관장할 경제사설치를 건의했으나, 제도개혁만으로 삼대의 치세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군주의 입지를 더 중시했다. 개혁에 있어서도 여론을 수렴하여 하나씩 점진적으로 실행하여야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진적이고 온건한 개혁을98)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제안은 애석하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④ 근검절약과 내수사(內需司) 폐지
이이는 당시의 국가 위기 상황을 불러일으킨 원인을 여러 가지로 진단하고 있다. 그는 「동호문답」에서 그 원인으로서 정치의 문란 · 관리의 가혹한 수탈 · 각종 부역의 번중 · 거듭되는 기근전염병의 발생 등으로 백성의 이산과 고을의 공동화 및 농토의 황폐화 등을 들고 있으며, <옥당진시폐소(玉堂陳時弊疎)>에서는 국가재정의 고갈 · 경비의 수입과 지출의 불균형 · 비정상적인 세금징수 · 국가와 국민 모두의 궁핍 등을 들고 있다.
그는 이러한 국가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폐법을 개혁하고 민생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보고 있다. 민생을 안정시키려면 맹자가 보는 것99)처럼 재산상의 안정이 선행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먹을 것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백성은 먹을 것에 의존하고, 나라는 백성들에 의존한다.
먹을 것이 없으면 백성이 없게 되고 백성이 없게 되면 나라도 없게 된다”100)고 하여 국가의 존망의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양민(養民)의 문제에 두고 있다. 그는 <옥당진시폐소>에서 국가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절약하여 쓰는데 있고 절약하여 쓰는 방법은 근검을 숭상하는데 있다고 했으며, <만언봉사>에서는 절검을 숭상하여 국용을 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이 그는 근면 절약 검소하는 것이 국가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첩경이라고 보고 있다.
국민에게 근검절약을 권장하려면 무엇보다도 왕실이 모범을 보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 국가재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왕실의 과다한 경비를 줄여야 하고 제도적으로는 왕실이 관장하던 내탕(內帑)과 내수사를 폐지하고 그 업무를 호조가 관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수사는 궁궐에서 사용하는 미곡, 포목 및 잡화와 노비 등을 관장하는 궁중 관련 기구였다.
명종 대에 이르러 이 내수사는 지방에 광대한 농장을 설치하여 부세를 면제받고 제택(堤澤)을 독점하여 이를 기반으로 고리채를 놓거나 백성의 땅을 탈취하여 경제력을 확대하고, 한편 그 내부에 형옥을 설치하여 독자적인 형벌권을 행사하기도 했으며 명종초 이래 제조(提調)의 인신(印信)을 만들어 지방관청에 이문(移文)하여 내지(內旨)를 빙자하고 각종 정형(政刑)에까지 관여하고 있었다.101) 그는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 내수사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창름(倉廩)과 부고(府庫)도 공공의 재물이 되어야지 국왕의 사저(私貯)가 되어서는 안되고 왕실의 경비도 국가경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102) 그 뿐만 아니라 국왕의 식료품과 의복용으로 들여오는 모든 물자와 궁궐의 일용품을 모두 3분의 1로 줄여야 한다고 했으며,103) 또한 국왕의 용품을 줄여 백성들의 힘을 아낄 것과 제사제도의 번잡함을 바르게 고칠 것 그리고 쓸데없는 경비를 모아 나라의 수요에 보태 쓸 것 등을 주장하였다.104) 요컨대 그는 국가가 절약 검소를 숭상하여 사치풍조를 일소할 것을 주장하였다.105)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근검절약을 숭상하여 국가의 재용을 아끼자고 했는데 이것이 그의 경제사상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그의 경제사상은 국가의 위기상황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국가와 왕실이 절약 검소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을는지 모르나 국가가 경제적 파탄에 직면해서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겠다.
그는 방법론상 무실(務實) · 실공(實功) · 실효(實效) 등을 강조하면서도 당시의 난국을 타계하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경제정책 예컨대 식산정책 등과 같은 정책을 개발 제안하지 않은 것은 전통적 유가경세론의 한계이자 율곡 경세론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모밍거는 그의 근검절약을 숭상하여 국가재정을 윤택하게 하자는 경세사상은 그 절유(節流)에 대해서만 말했고 그 개원(開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의 경세사상이 불충분하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까닭은 목전의 위기상황이 너무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06)
그가 제안한 내탕과 내수사 폐지에 관한 건의는 선조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그가 국가경제의 재건을 위해서는 먼저 왕실과 국왕의 근검절약정신이 확립되어야 한다는 기본방향을 제시했다는 점과 전제주의 사회에서 왕실의 재정적인 문제에 감히 언급할 수 있는 그의 용기와 기개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할 수 있다.
⑤ 세제개혁과 수미법(收米法)
이이의 경제 및 재정정책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것은 절약 검소를 통해서 국가의 재용을 아끼는 것과 부세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국민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다. 이제 이 후자와 관련된 세제개혁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이는 「동호문답」과 <만언봉사>에서 이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 그는 「동호문답」의 <안민지술(安民之術)>에서 당시의 가장 폐해가 크고 따라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폐단과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제시한 다섯 가지의 폐단 가운데 세제개혁과 관련되는 것은 공물방납(貢物防納)의 폐이다. 이러한 폐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는 <수미법> 시행과 공안(貢案)의 개정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해주(海州)의 공물 납부방법은 밭 일결(一結)마다 쌀 한 말씩을 징수하여 지방관이 스스로 공물을 마련하여 서울에 납부하기 때문에 관리들의 폐단이 없어지게 되었다고 하며 이 제도를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할 것과 공안의 개정을 제안했다.107) 이러한 <수미법>이 시행되려면 공안개정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공안개정을 하기 이해서는 전국의 도적(圖籍)을 검토하여 고을의 인구, 토지, 물산 등을 다시 조사하여 그 경중을 공평하게 하고 국용에 적절하지 못한 것은 적당하게 줄여서 각 고을이 판출하는 방법을 해주의 일결일두(一結一斗)와 같이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108)
해주에서와 같이 한다는 것은 각 고을에 일정한 양이 정해지면 해주에서와 같이 토지를 기준으로 토지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일정하게 부과한다는 뜻이다. 즉 각 민호(民戶)의 경제력에 상응하게 부과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공안개정이 이루어지면 토지를 기준으로 해서 특산물 대신 쌀로 납부토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미법>의 실시는 특산물 대신 쌀을 수납함으로써 특산물의 운송에 따른 불편과 특산물의 변질을 막을 수 있으며 특산물 대리납에 따르는 부정부패를 제거할 수 있는 등 여러 가지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1569년 선조 2년에 그에 의하여 제안된 이러한 <수미법>의 건의는 국왕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후에 <대동법(大同法)>의 효시가 되었으며, 1608년 선조 41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전국의 토지가 황폐화되고 국가의 수입이 감소되어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건의에 따라 방납의 폐해가 가장 컸던 경기도에서부터 시행되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만언봉사>에서도 공안 개정 문제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공안은 우선 연산군 때 더 늘여 놓은 분량을 모두 없애어 선대의 옛 모습을 되찾아야 합니다. 여러 고을의 물산의 유무나 전결(田結)의 다소 및 민호의 잔성(殘盛) 등을 조사하여 그에 따라 공물의 양을 정하여 한결같이 균등하고 평등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본색(本色)으로써 각사(各司)에 납부하게 하면 방납은 금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지게 되고 백성들의 삶은 극심한 고통에서 풀려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시급히 해야 할 일로써 이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109)
여기에서도 <동호문답>에서와 같이 고을의 인구, 토지, 물산의 많고 적음을 조사하여 그에 따라 공물의 양을 정하여 한결같이 균등하고 공평하게 해야 한다는 공안개정을 주장하고 있으며 본인이 본디대로 스스로 납부해야 한다는 <본색납(本色納)>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만언봉사>에서는 <수미법>에 관한 언급이 전연 없다.
그것은 당시의 탐관오리들의 방해나 부유층의 반대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110)도 있으나 그의 기개와 태도로 보아 <수미법>의 시행이 위에서 언급한 이점이 있는 한 그것에 대한 그의 개혁의지가 그렇게 쉽게 꺾이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는 어떤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수미법> 실행에 따른 관수물품 조달의 어려움, 특산물 생산의 위축, 그리고 미곡생산이 어려운 산악지대에 있어서 <수미법> 시행에 따른 어려움 등을 고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밖에도 그는 토지세는 정확한 측량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보고 있으며 황무지가 된 진황전(陳荒田)에 대한 세금 부과를 면하게 해야 하며, 갑작스런 수요를 상인들에게서 판출시키는 것과 이름도 모르는 잡세를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이는 일111) 등을 금해야 한다는 감세정책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공납과 같이 특산물 납부에 속하지만 임금에게 헌납하는 진상품 납부는 민호에게도 피해가 큼으로 민호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식료품과 의복용으로 들여오는 모든 물자와 궁중의 일용품을 일률적으로 3분의 1로 줄여야 한다고 건의했다.112) 그는 이처럼 국민의 부담을 줄이고 민생의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감세 내지 절세 정책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부족한 재용을 충당하기 위하여는 토지세의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취하여 서로 상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요즈음은 전세(田稅)가 가벼운 것이 맥(貊)의 도(道)와 같아서 1년의 수입이 지출을 감당하지 못하여 매번 전에 비축해 놓은 것을 보충해서 씀으로써 200년 동안 축적해 온 나라가 지금은 2년 동안 쓸 양식이 없으니 나라가 나라꼴이 아닙니다. ··· 이렇게 민력(民力)을 여유 있게 하고 민정(民情)을 위로한 후에 적당히 전세를 증수한다면 국가의 재정이 점차 충족될 것입니다. 공안(貢案)을 개정하는 것은 백성을 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경비를 위해서입니다.”113)
위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세의 증세를 건의했는데, 이것은 이전의 주장과 상충되는 것과 같이 보이지만, 그는 당시의 국가재정을 고려할 때 증세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전세의 증세는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이므로 토지의 다과에 따라 부과액이 결정되므로 토지를 작게 가지고 있는 일반 서민들의 부담은 크게 증가되는 것이 아니며 공안개정을 통하여 백성들의 부담은 10분의 9가 감해지므로 토지세 증세로 인한 부담은 미미하다고 그는 보았기 때문이다.114) 여기에서 우리는 이이의 조세정책에 대한 견해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일반 서민의 부담을 가능한 줄이면서도 대국적인 견지에서 국가의 보존과 양민(養民)이라는 두 입장을 고려하여 징세제도를 생각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는 때로는 증세도 불가피하다는 합리적이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는 또한 토지 소유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빈부의 격차가 심하다고 보고 있으며115) 토지소유의 균등을 위하여 기자정전제(箕子井田制)와 같은 것을 고려해 보았지만116) 그러한 토지개혁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요컨대 이이의 세정개혁은 공납개혁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 기본정신은 부정부패와 백성들에 대한 수탈을 방지하여 국가경제를 튼튼하게 함과 동시에 백성의 생활안정을 도모하려는 의도가 함께 배어 있으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공평과세와 감세정책을 지지하여 빈부의 격차를 줄이려는 위민 · 평등사상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국가의 재정을 위해서는 증세도 불가피하다는 합리적 재정관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⑥ 군정개혁과 십만양병설
이이의 개혁론 가운데 초기의 작품인 「동호문답」에서부터 <만언봉사>, <진시사소(陳時事疎)>를 거쳐 <육조계(六條啓)>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이 가장 강력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국방개혁과 세정개혁이었다. 그가 이 두 영역을 그렇게 강력하게 다룬 것은 당시의 공물방납(貢物防納)의 폐단과 인징(隣徵) · 족징(族徵)으로까지 번지는 군역의 폐단을 그대로 방치해둔다면 일족절린(一族切隣)의 폐단이 야기되어 백성들은 유랑민이 되고 고을 전체는 공동화되어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두 영역을 상호 불가분의 관계로 보고 대체로 한데 묶어서 다루고 있다. 그것은 공안개혁이 없으면 민력이 신장되지 못하고 민력이 신장되지 못하면 양병을 할 수 없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117) 그러나 필자는 앞장에서 세정개혁을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편의상 군정개혁만을 따로 떼어서 취급하고자 한다.
이이는 당시의 군정이 무너지고 국가의 무방비상태를 선조에게 각성시키기 위해서 당시 흰 무지개가 해를 뚫는 기상이변을 천변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전란의 상이라고 단정하고 선조의 군정개혁의 의지를 촉구했다.118)
이이의 군정개혁에서 우선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군적의 정리이다. 그에 의하면 군적과 공안이 다 같이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데서 백성의 유랑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옛날에 100가호(家戶)가 살던 마을이 10가호도 못되고, 10가호의 마을이 지금은 한 집도 없이 고을이 소조하고 밥짓는 연기가 그쳐 어느 곳이건 그렇지 않는 것이 없으니 만일 이러한 폐단을 개혁치 않으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려 나라를 이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119)는 것이다.
원래 군적은 6년마다 한 번씩 현 인원을 파악하여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오랫동안 군적개정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1553년 명종 8년에야 다시 군적개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과 일치하지 않고 수를 채우기 위하여 거지나 심지어 닭이나 개 이름까지 군적에 올리게 되어 결국 한두 해가 지나지 않아 군적은 거의 빈 장부가 되었다는 것이다.120) 이렇게 군적의 수를 부풀리는 것은 당시 군역의 이행을 베(면포(緜布))로써 대납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었으므로 군적의 수를 줄이는 것은 국가 및 관리들의 수입이 줄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거의 빈 장부가 되어버린 군적을 사실과 일치하도록 개정해야 하고 원칙대로 6년마다 한 번씩 군적을 새로 작성해야 한다고 건의했다.121)
둘째, 변방을 지키는 장수(변장)에게 보수를 주고 병무를 관장하는 첨사(僉使), 만호(萬戶), 권간(權管) 등의 관리들에게도 군의 직책을 주어 보수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 나라 법제는 결함이 많아, 다만 병사(兵使), 수사(水使), 첨사, 만호, 권관 등의 벼슬만 마련해 놓고 먹고 살 봉급은 주지 않아 사졸(士卒)들에게서 거두어들이게 해서 변장(邊將)들의 재물 수탈하는 폐단이 시작되었으며, 그리고 인재를 뽑아 등용하는 것도 불공평하여 채수(債帥; 돈을 주고 장수가 된 사람)가 연달아 생기고 ‘어떤 진(鎭)의 장수는 그 값이 얼마고, 어떤 보(堡)의 벼슬은 그 값이 얼마이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생겼다고 한다.
사졸들이 유방(留防)을 힘들게 여기서 면포를 납부하고 군역을 면제받고자 하면 이를 기꺼이 허락할 뿐만 아니라 진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일을 부과하며 감당하지 못할 부담을 뒤집어 씌워 기름불 속에서 들볶듯 하여 그들도 면포를 납부하여 군역을 면제받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도 결국 면포를 납부하여 군역을 면제받지만 두어 번 군역을 면제받으면 가산이 탕진되어 결국 도망치고 그러면 그 일족에게 그것을 대신시켜 이러한 현상이 연달아 일어나 고을 전체의 공동화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122)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우선 병영 · 수영 · 진 · 보가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그 고을 장부이외의 곡물로써 변장들의 양식을 우선 지급토록 하고 그 고을의 곡물이 부족하면 이웃 고을의 곡식을 거두어 변장의 생활에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 하고 법제를 엄하게 하여 한 조각의 면포나 한 말의 미곡도 사졸들에게 거두어들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123) 뿐만 아니라 첨사 · 만호 · 권관 등의 관리직은 모두 군직에 소속되게 하여 처자로 하여금 녹을 받아 생활을 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124)
셋째, 이이는 군병사의 거주지와 근무지를 일치시켜야 한다고 한다. 군병사가 거주지에서 근무하지 않고 수 천리 원거리에서 근무하게 됨으로써 풍토병에 걸리는 자가 많으며 장수의 학대나 그 지방 사졸들의 괄시를 받고 객지에서 고생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 천리 먼 곳으로 가서 유방(留防)할 경우 그 비용이 전 재산을 팔아야 할 정도로 많이 들게 되어 결국 도망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 병사의 거주지와 근무지를 일치시켜야 한다고 한다.125)
넷째 이이는 군 인력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나장(羅將), 조례(皂隷) 등 비정규군을 폐지하거나 정규군으로 편입시켜 군의 정예화를 기해야 한다고 한다. “수군이나 육군으로서 변방에서 창을 들고 있는 자는 얼마 되지 않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변장들에게 면포로 대가를 바치고 있습니다.
대개 현존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병영을 부과할 수 있지만 도망쳐 떠나간 사람들에게는 다만 그의 일족에 분담시켜 그 대가를 징수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편대 이외의 사졸을 줄이는 것은 다만 받아들이는 포물(布物)을 줄이는 것일 뿐이지, 방비의 허실과는 처음부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군대란 정예가 못되는 것이 걱정이지 수가 많지 않은 것은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나라가 만약 부강하고 번성한다면 온 백성이 모두 군사가 될 터인데 어찌 군사 없는 것이 걱정이 되겠습니까?”126)
이와 같은 비정규군을 폐지하여 생기는 군원(軍員)의 부족을 충원하는 방법으로는, 「동호문답」에서는 국가의 부역에 나가지 않는 장정을 정리하여 모자라는 군원을 채우고 여(旅)외는 모두 없애어 정규군을 보충하고 위(衛)에 대해서는 『경국대전』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과 한역(閒役)의 적(籍)에는 이름이 있지만 공가(公家)에 도움이 없는 사람은 모두 밝혀서 병역에 충당하고 병무관서로 하여금 한정(閒丁)을 찾아내게 하여 보충해야 한다고 한다.127)
그리고 <만언봉사>에서는 고급 군인들의 수를 줄여 모자라는 군졸의 임무에 충당하고 한가한 곳의 군인의 수를 감소하여 부족한 곳으로 충당하며 남부 지방에서 겨울동안 유방(留防)하는 군사의 수를 줄여 부족한 곳으로 충당하며 그래도 부족하면 보병의 대역포(代役布)를 바치는 자의 수를 반으로 줄여서 방위의 부족을 보충케 할 수 있다고 한다.
다섯째, 이이는 무기를 정련하고 말타기와 활쏘기 등 군사훈련을 함과 동시에 군마를 길러 이를 통한 전력을 증대시켜 군의 전쟁 수행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한다.128) 그는 군마의 육성방안에 관하여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으나 서양의 무기가 일본 등에 도입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무기의 새로운 개발에 관해서 언급이 없는 것은 병조판서를 지낸 그로서는 아쉬운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여섯째, 이이는 군병을 유지하기 위한 군량미비축과 군의 사기진작을 위한 군인사제도의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군직을 처음 부여할 때에는 반드시 그 사람됨을 고르고, 이미 군직을 준 뒤에는 다섯 번 시험을 보아 모두 장원하면 권관에서 만호로, 만호는 첨사로, 첨사는 동반(東班) 6품직으로 승진시키고, 다섯 번 시험에 중을 받은 자는 다른 진의 서열이 같은 직급으로 옮기게 하고 스스로 앞길을 아끼어 권면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도 매월 3월에 활쏘기 대회를 열어 성적이 우수한 자는 후하게 상을 주고 두 번 일등한 자는 그 가족의 역(役)을 면하게 하고 다섯 번 장원한 자는 그가 군졸이면 군관으로 보하고 그 중에 지식이 있는 자로서 군 통솔력이 있는 자는 당국에 보고하여 권관에 보하여 그 임용여부를 검토케 하며, 공천(公賤)이면 천한 신분을 면하게 하고 사천(私賤)이면 그 주인에게 값을 후하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백성들 간의 활쏘기 대회를 통하여 백성들이 모두 정병으로 되어 국민 개병의 효과를 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129)
이이는 이상과 같은 국방개혁안을 제시하면서 또한 국민의 정신무장을 강조했다. 그는 그의 후기 작품인 <육조계>에서 우리 나라는 태평한지 이미 오래되어 매사에 태만함이 심하여졌고, 서울과 지방이 공허하고 군사와 식량이 모두 궁핍하여 조그마한 오랑캐가 변경을 침범하여도 온 나라가 놀라 흔들리는데 만일 큰 오랑캐가 침입한다면 비록 지혜 있는 사람일지라도 이를 막을 계책이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경원의 오랑캐의 소굴을 소탕해야 한다고 건의하고 있다.130)
그리고 그는 10만 병력을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씩을 두어 호세를 면제하여 주고 무예를 단련케 하여 6개월마다 나누어서 번갈아 도성을 수비토록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131)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건의는 대신들과 선조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 후 10여 년 후에 임진왜란이 발발한 점을 고려할 때, 그의 통찰력과 선견지명에 대하여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율곡의 군정개혁은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여 고을의 공동화현상을 막고 백성들에게는 민생안정을 가져오고, 군사적 측면에서는 군의 사기를 높이고 군의 정예화를 기하여 국방력을 강화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한 개혁의 과정에서 파생적으로 공사천의 속양(贖良)과 같은 제안을 했는데 이는 다소 부수적132)인 면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제안이었으며, 군사력 보강방안의 하나로 제안된 활쏘기 대회의 개최주장에는 국민개병과 같은 사상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내용이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제시되지 못했다. 그리고 군의 인사문제에 있어서 첨사가 무술대회에서 다섯 번 장원하면 동반 6품직으로 승진하도록 건의한 것은 율곡 스스로 무를 문보다 낮게 보는 인식과 시각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⑦ 학교개혁과 교화
이이는 경세의 목표를 전통적 유가경세론에서처럼 치인 곧 안민에 두고 있다. 치인(治人)은 의식주의 해결을 통한 양민(養民)과 백성들의 도덕적 심성을 순화시키는 교화(敎化)로 나누어진다. 그는 이 양자의 순서상 양민이 먼저이고 교화가 뒤에 와야 한다고 한다.133) 그런 후에 예와 의를 알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양민 후에는 교화를 베풀 수 있으며, 교화를 펴는 방법은 학교 교육이 으뜸이 된다고 한다.134)
그는 학교는 백성의 풍습을 교화시키는 근본인데 당시의 학교가 황폐하여 풍습의 교화를 일으킬 수 없다고 한다. 서울에 있는 성균관(成均館)은 이미 학문을 일으키기에 부족하고 지방에 있는 향교(鄕校)는 더욱 한심스러우며 서원(書院) 역시 스승과 어른이 없어 유생들이 서로 모여 마음놓고 방자하여져 공경하고 본받는 것이 없어서 연마의 효과가 없어졌다는 것이다.135) 이러한 학교의 황폐화에서 벗어나 학교 본래의 목표인 교화를 실현하려면 학교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는 학교개혁을 위해서는 우선 우수한 교사(훈도)가 있어야 한다고 하며, 그 유인책으로 교사에 대한 예우, 평가방법, 승진방법 등을 합리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또한 교육내용에 관하여도 자기 나름대로의 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학교교육에는 무엇보다 우수한 교사(훈도)가 있어야 하는데 당시의 교사는 가난하고 재산이 없는 사람들이 교육에 종사하여 교육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토색함으로써 그들의 배를 채울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환경으로는 인재 육성을 바란다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러한 교육여건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사의 질을 높여야 하고 그러려면 교사의 선발에 있어서 교사를 정선해야 한다고 한다.
첫째는 8도의 감사가 각 고을에 통첩하여 3년마다 한 번씩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남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을 뽑아 그 명단을 적어서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여러 고을에서 선발된 사람을 종합하여 이조(吏曹)에게 넘기면 이조에서는 그 명부를 살펴서 공론에 붙여 정선해야 하며, 둘째 교사를 임명할 때에는 반드시 그 고을 사람을 임명하고 그 고을에 적당한 사람이 없을 때에는 이웃 고을 사람을 임명하고 이웃 고을에도 적당한 사람이 없을 때에는 그 도 사람을 임명해야 하며, 셋째 임용기간은 정하지 말고 오직 교육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채우게 해야 한다고 한다.136) 그리고 그는 교사의 사회적 예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제의하고 있다.
첫째, 관직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사를 예로써 대우하고 향교에 들어올 때만 영접하도록 한다. 둘째, 유생들의 시강을 제외하고는 공회에 참석하지 않게 한다. 셋째, 감사가 유생들의 성적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유생들만 시험하고 교사는 시험하지 말아야 한다.137) 넷째, 교직에 있는 사람에게는 중국 제도에 의거하여 국가에서 봉록을 주어야 한다.138)
그리고 그는 교사의 평가방법으로는 그 교사 밑에서 배운 유생들이 도학을 숭상할 줄 알고 그들의 행검(行檢)이 신칙하고 독서에 있어서 궁리에 힘쓰는 것을 요강으로 삼아 면학하는 경우 최상의 평가를 받으며, 유생들이 태만하지 않고 조행(操行)에 흠이 없으며 과거(科擧)의 습속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영진에 현혹되어 지조를 잃지 않았다면 차선으로 평가받고, 유생이 글의 뜻을 잘 알고 저술에 능하면 그 다음으로 평가받는다.
성적이 최상의 평가를 받은 사람은 국가에 아뢰어 상을 의논하되 6품 이상의 벼슬에 임명함으로써 사림의 사기를 올리게 하고 그 다음 평가를 받은 사람도 자급을 올려서 포상을 하여 교육에 힘쓰게 하고 또 그 다음 평가를 받은 사람은 감사가 더욱 진보하도록 장려하며 그리고 여전히 녹녹하여 별다른 성과가 없는 교사는 곧 좌천시키고 여전히 탐욕스러워 학생을 토색하는 사람은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교사의 직책이 매우 중하여져서 교직에 나아가기를 싫어하던 선비들도 즐겨 교직에 진출하게 된다는 것이다.139)
이이는 교육의 내용에 관하여는 덕성과 신의를 중하게 여기는 교육이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국가가 인재등용에 있어서 문예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어서 학식과 덕행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140)그리고 그는 1577년 그의 나이 42세 때 해주 석담(石潭)에 청계당(聽溪堂)을 짓고 제자들을 모아서 교육할 교재로 쓰기 위하여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여 초학자들의 교육내용을 제시했다.
이것은 국민교화를 위한 여러 가지 교육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교육내용은 인재등용이나 교화에 필요한 도의교육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무실 · 실효 · 실공을 거둘 수 있는 생산적인 실업교육을 담지 못한 것은 유가경세론의 한계이며 따라서 유가경세론을 모델로 한 그의 경세론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이는 학교교육의 문제는 자질이 없는 교사가 교육을 담당함으로써 교육의 질적 저하가 우려될 뿐만 아니라 교육부조리도 야기된다고 보았으며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경사(經史)에 밝고 교사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나 은퇴한 관리로서 사표가 될 수 있는141) 그 지방 출신자를 정선해서 쓰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교사의 선발 자격 기준은 교육의 목표가 유가적 식견을 가진 인재를 기르는 데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교사의 주거지와 근무지를 일치시키려는 것은 군 병사의 주거지와 근무지를 일치시키려는 의도와 같이 그것의 불일치에서 오는 폐단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교사의 사회적 및 경제적 예우의 문제는 좀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제기되었어야 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교사의 평가방법은 교사의 시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가 지도한 학생들의 결과를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는 견해는 탁견(卓見)이라고 할 수 있다.
(5) 맺는 말
이이는 유가경세론의 목표인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당시의 조선의 상황으로서는 사회개혁 및 제도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시대인식과 역사인식을 통하여 역사를 창업기 수성기 경장기로 나누고 당시를 경장기로 규정했다.
그는 이러한 역사인식을 통해서 역사의 진행과정을 필연적으로 진행한다는 결정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한편 그는 인간의 의지를 강조함으로써 변화의 에너지공급을 비결정론적 사고 유형에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는 이처럼 그의 경세론에서 역사가 필연적으로 순환하는 것으로 파악하면서도 숙명론에 빠지지 않고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주역』에 내포된 사상이기도 하지만 희랍인들의 사고유형과 같이 역사순환론의 일반적 경향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맑스의 역사철학에도 드러나고 있다. 그가 역사적 인식을 이처럼 결정론적 입장과 비결정론적 입장을 동시에 주장하게 된 이유는 당시의 군주에게 국가의 위기상황을 주지시켜 그것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한 의욕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본문에서 제시된 그의 경세론을 간단히 요약 정리하면서 그 의의와 성격 및 실패의 원인 등을 살펴보자.
우선 의식개혁에 있어서는 군주가 인습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특히 지치에 대한 입지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으며, 인사에 있어서는 어진 인재를 등용하여 군왕을 보필해야 하고 관직에 관심이 없는 유능한 인재까지도 등용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제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천거제(薦擧制)를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인재 등용에 있어서는 오늘날의 인사청문회와 유사한 방법을 고려하여 공론의 검증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세정개혁에 있어서는 당시의 공납(貢納) 제도는 공물(貢物: 특산물(特産物))의 방납(防納: 대리납(代理納))으로 인하여 부정부패가 만연했을 뿐만 아니라 세금을 못 내서 도망자가 속출하고 그리하여 일족절린(一族切隣)의 폐단이 야기되어 결국 고을 전체의 공동화현상이 야기되어 국가존망의 위기상황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러한 폐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군정개혁과 함께 세정개혁 곧 공안개혁(貢案改革)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공안개혁은 고을의 인구, 토지, 물산 등을 고려하여 일정하게 공납을 배정하고 각 민호(民戶)들에게는 토지의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균평(均平)하게 부과하되 가급적 쌀로 직접 납부할 것을 제의했다. 이러한 제의는 공안 대리납에서 오는 폐해를 방지하여 국가의 재용을 윤택하게 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폐해를 제거하여 백성들의 생활안정을 기하자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이는 세정과 관련하여 공안을 부과하기 전에 토지의 정확한 측량을 제의했으며, 토지의 많고 적음에 따라 공평과세를 부과하고 상인에게 불시에 부과하는 과세라든가 이름 모를 여러 가지 잡세를 근절할 것을 제의했으며,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비록 구체화되지는 못했지만 토지소유제한의 필요성을 깨닫고 균전제(均田制)를 구상하여 기자정전(箕子井田)의 제도를 표명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국왕의 진상품을 3분의 1로 줄여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진황전(陳荒田)에 부과하는 세금의 감세 내지 폐지 등을 건의하면서도 국가재정의 고갈상태를 막기 위해서는 토지세의 증세를 주장하여 징세의 목적과 의도 및 그 효능에 대한 종합적이고 합리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또한 폐법개정과 치정에 있어서 언로의 개방과 공론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공론을 국가의 원기(元氣)라고 하여 중시했다.
그는 군정개혁에 있어서 군의 사기진작과 군의 부정을 방지하기 위하여 변방장수의 보수를 국가가 주지 않는 제도상의 모순을 지적했으며, 군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먼저 군적을 사실과 일치하게 작성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군 인력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나장(羅將), 조예(皂隸)와 같은 비정규군을 정규군으로 편입시켜야 하며, 병사들의 훈련과 상벌을 통하여 강군을 만들어 전투력과 방어능력을 제고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군기의 개량과 군마의 육성을 통하여 전투에 있어서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국방개혁에 관한 그의 제안은 당시의 국내외적 상황으로 봐서 시의적절한 것이었으며 특히 10만 양병설은 그 후 10여 년 후에 발발한 임진왜란과 이어서 일어난 병자호란을 고려할 때 국제적 상황을 통찰한 탁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학교개혁에 있어서 교사의 자격과 예우, 교육내용 및 평가방법을 제시했지만 평가방법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교화를 경세의 종국적 목표로 간주함으로써 그의 경세론의 성격이 종국적으로는 예의의 실현 곧 덕치주의에 있음을 말해 준다.
이 밖에도 그는 노예의 속양(贖良)과 서얼차별제도(庶孽差別制)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부분적인 것이긴 하지만 매우 진보적인 개혁정신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의 위민 민본 평등사상의 발로라고 하겠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대부분의 개혁안은 선조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만 군정개혁에 대해서만 선조는 관심을 표명하고 시행하려고 했지만 그의 죽음으로 유보되고 말았다. 그러면 그의 개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첫째, 선조의 개혁의지가 작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선조는 경제사설치, 내수사폐지, 천거제실시, 천거로 등용한 인재의 대간(臺諫) 임용금지의 폐지 등과 같은 제도개혁에 관하여, 그러한 제도개혁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위배된다는 등 여러 구실을 붙였지만 내심으로는 그러한 개혁이 왕실의 권한을 위축할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선조의 우유부단하고 교만한 성격과 이이의 직설적이고 어떤 점에서는 경솔한 태도142)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두 사람의 성격상 차이 때문에 선조가 때로는 그를 신임하면서도 때로는 배척했을 수도 있다. 특히 이이의 이러한 성격은 당시 대신들의 신임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동서붕당의 갈등으로 인하여 이를 화합하려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 진영으로부터 여러 가지 오해를 불러 일으켜 그가 탄핵을 받을 정도로 그의 정당한 주장이 질시를 받았다는 점이다.
넷째, 그의 개혁안은 대부분 집중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하고143) 단편적이면서도 총론적이어서 전체적 개혁의지와 강력한 지도력이 없는 선조로서는 전체적으로 실행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요컨대 이이의 경세사상은 전통적 유가경세사상을 계승하여 유학본연의 덕치주의적 왕도정치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현실인식과 역사인식을 통하여 국가의 위기상황을 진단하고 국란극복을 위하여 폐법개혁 제도개혁에 치중한 점에 있어서 전통적 유가경세사상과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그의 경세사상은 위민 민본사상 뿐만 아니라 노예의 속량이나 서얼차별폐지와 같은 당시로서는 진보적 평등의식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경세론에서는 국가의 위기상황을 정확히 진단했을 뿐만 아니라 그 해결방안을 제시하면서 군주의 개혁의지를 무엇보다 강조하였다는 점이 돋보이며, 특히 그의 10만양병설은 그의 위기대처 능력과 더불어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국가안보에 관한 관심을 후손들에게 영원히 각인시키는 교훈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각주
- 1)
答成浩原, 壬申, “退溪與奇明彦論四七之說 無慮萬餘言 明彦之論則分明直截 勢如破竹 退溪則辨說雖祥 而義理不明 反覆咀嚼 卒無的實之滋味···.”
- 2)
拙稿, 高峯 奇大升의 經世思想, 龜岩李敬洙博士 古稀論叢, p.120. 참조.
- 3)
尹絲淳, 栗谷의 國防思想 p.107, 율곡사상연구 제3輯, 율곡학회(1997).
- 4)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옥당진시폐소(玉堂陳時弊疎)>, <육조계(六條啓)> 등 여러 곳에서 이러한 시대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 5)
<栗谷全書>권3, <玉堂陳時弊疎> 참조.
- 6)
<聖學輯要>
- 7)
<栗谷全書>권30, 經筵日記3, 萬歷 9년 7월條.
- 8)
<栗谷全書>, 卷5, <萬言封事>, “我國祖宗立法之初 固極周詳 而年垂二百 時變事易 不無弊端猶可變通 況後日謬規 汲汲改革 當如救焚拯溺者乎 傳曰 窮則變 變則通 伏願殿下留念思所以變通焉”
- 9)
<孟子>, 藤文公下篇 제9장, “公都者曰 外人皆稱夫子好辯何也 孟子曰 予豈好辯哉 予不得已也 天下之生 久矣一治一亂”
- 10)
<맹자>, 公孫丑下篇 제13장, “曰彼一時 此一時 五百年 必有王者興 其間 必有名世者.”
同上, 盡心下篇 제38장, “曰 由堯舜至於湯 五百有餘歲 ··· 由湯至於文王 五百有餘歲 ···. 由文王至於孔子 五百有餘歲 ···” - 11)
高柄翊 <儒敎思想에 있어서 進步觀>, 車河淳 編 <史觀이란 무엇인가>청람, 1983, pp.241-242.
- 12)
R.G.Collingwood, The Idea of History, p.23.
- 13)
李相益, <歷史哲學과 易學思想>,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96. p.45.
- 14)
<全書> 권15, <東湖問答>, “治亂在人 不係於時 時也者 在上者之所爲也.”
- 15)
宋翼弼 撰 <栗谷全書> 卷37, 附錄5, 祭文2 “··· 敬信小學 尊尙近思 旁通史氏 發揮諸經句”
- 16)
易 繫辭下傳 제2장, “易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是以 自天祐之 吉无不利.”
- 17)
<周易傳義大全> 권7, p.6. 本義: 窮謂滿極. p.27. 本義: 窮極也.
- 18)
<東湖問答> ‘論我朝古道不復’章 참조.
- 19)
同上.
- 20)
韓國儒學思想論文選集49, 琴章泰, <栗谷의 時務論과 社會思想>, p.283.
- 21)
<栗谷全書>권7, 陳時事疏.
- 22)
<栗谷全書> 권3, 疏箚1, “近年以來 政紊吏苛 賦繁役重 饑饉荐臻 疫疣繼作 壯者散之四方 弱者塡於溝 壑 嗷嗷赤子 如彼棲苴 邑里蕭條 田野荒蕪 或至於百哩之間 不見人煙 氣象悲涼 令人墮淚.”
- 23)
<栗谷全書> 권7, 陳時弊疏
- 24)
同上.
- 25)
<栗谷全書> 권7, 陳時事疏, “若殿下悉用臣策 堅持不變 旣行三年 而民生不安 國用不足 養兵不如意 則雖加臣以斧鉞之誅 臣實甘心矣.”
- 26)
<栗谷全書> 권30, 經筵日記3 今上14년 7월條, “自古立國旣久 則法制漸弊 人心解馳 必有賢王作焉 修擧廢墜 改紀其政然後 國勢復振 其命維新矣 不然則因循頹墮 以至於不可匡救 其狀不難見矣 我朝立國 旣二百年 此是中衰之日 而多有權姦濁亂之禍 至於今日 如老人元氣垂盡 不可復振 而幸有聖上出焉 此是將治亂之幾也.”
- 27)
<栗谷全書> 권5, 萬言封事, “奮聖志 期回三代之盛.”
- 28)
<栗谷全書> 권25, 聖學輯要7, 法先王, “臣按三代之道 決可行於今日.”
- 29)
同上, “程子嘗曰 爲國而至於祈天永命 養形而至於長生 學而至於聖人 此三事 分明人力可以勝造化 自是人不爲耳.”
- 30)
上揭書, “伏願殿下 濯去舊見 以來新意 奮發大志 期興至治.”
- 31)
<전서> 권7, 陳時弊疏, “自古明王誼辟 不能獨治 必得賢者而共國 ···”
권25, 聖學輯要 爲政策4, “更張者 非有高見英才 則不能也 更張難.” - 32)
<율곡전서>, 上退溪先生, “國家之沈於痼疾 二十餘年矣 上因下循 一毫不改 目今民力竭 國儲已罄 若不更張 將不國 入朝之士 何異幕燕.”
- 33)
同上, 권14, 雜記, “情動後緣情計較者爲意.”
- 34)
同上, 권20, 聖學輯要, “心之因所感 而紬繹商量者 爲之意.”
- 35)
聖學輯要2, “志者 心有所之之謂 情旣發而定其趨向也 之善之惡 皆志也.”
- 36)
同上, 권10, 答成浩原, “人心道心 本無相對之苗脈也.”
- 37)
동상, 권9, 答成浩原, “氣發直出於正理 而氣不用事 則道心也 七情之善一邊也 發之之際 氣已用事 則人心也 七情之合善惡也 知其氣之用事 精察而趨乎正理 則人心聽命於道心也 不能精察而惟其所向 則情勝慾熾而人心愈危 道心愈微矣 精察與否 皆是意之所爲.”
- 38)
율곡의 현재등용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만언봉사(萬言封事)> <진시사소(陳時事疎)> <간원진시사소(諫院陳時事疎)> <옥당진시폐소(玉堂陳時弊疎)> 등 대부분의 상소문과 <성학집요(聖學輯要)>6 용현장(用賢章) 등에 나타나고 있다.
- 39)
見註42.
- 40)
<全書> 諫院陳時事疎
- 41)
黙明哲, 韓國儒學論文選集 18, 율곡의 경세사상에 관한 試論. p.467.
- 42)
拙稿, 龜巖 李敬洙博士 古稀論叢, p.124 참조.
- 43)
<全書> 諫院陳時事疎
- 44)
<全書> 諫院陳時事疎.
- 45)
同上.
- 46)
<全書> 聖學輯要6.
- 47)
同上.
- 48)
조선후기의 학파들, 예문서원, 정대환, 天命圖와 朝鮮性理學의 向方 p.20 참조.
- 49)
<論思錄>上篇 丁卯 10월 23일 朝講 및 11월 4일 조강. 11월 29일 夕講
- 50)
『全書』 萬言封事
- 51)
『全書』卷3, 論尹元衡疎
- 52)
『全書』권3, 玉堂陳時弊疎 “心慕古道 身飾儒行 口談法言 以持公論者 謂之士林 士林在朝廷 施之事業 則國治 士林不在朝廷 付之空言 則國亂 自古君子小人之進退 治亂所係.”
- 53)
『全書』권7, 辭大司諫兼陳洗滌東西疎, “自古國家之所恃而維持者士林也 士林者 國家之元氣 ···”
- 54)
『全書』, 陳時弊疎, 壬午.
- 55)
『全書』권3, 玉堂陳時弊疎.
- 56)
<諫院陳時事疎>
- 57)
宣祖修正實錄 권9, 선조 8년 7월 조
- 58)
『全書』권3, 옥당진시폐소. <선조실록> 권7, 선조 6년 10월 乙未조 참조.
- 59)
『全書』, 권7, 司諫院乞變通弊法箚 및 擬陳時弊疎
- 60)
同上, 卷4, 擬陳時弊疎.
- 61)
同上.
- 62)
同上, 卷7, 陳時事疎.
- 63)
同上, 卷4, 擬陳時弊疎 및 卷7, 陳時弊疎.
- 64)
宣祖實錄, 권17, 宣祖16년 4월 乙丑, 21冊 p.389.
- 65)
同上, 卷35, 行狀, “冬 遷吏曹佐郞 慨然仕路之溷濁 務張公道 欲防關節 請託之路 銓長朴永俊 不肯 先生歎曰 痼弊誠不可醫也.”
- 66)
同上, 권24, 聖學輯要6, 用賢章, “孟子曰 左右皆曰賢 未可也 諸大夫皆曰賢 未可也 國人皆曰賢 然後察之 見賢焉 然後用之 左右皆曰不可 勿聽 諸大夫皆曰不可 勿聽 國人皆曰不可 然後察之 見不可焉 然後去之.”
- 67)
『全書』, 卷 疏.
- 68)
『全書』권7, 진시폐소 및 진시사소 참조.
- 69)
同上.
- 70)
<명종실록(明宗實錄)>권31, 21책 p.31에서 대호군(大護軍) 정질(鄭礩)이 상소문에서 외척(外戚)의 발호를 종사(宗社)와 안민(安民)의 원수로 규정했으며, 기대승의 <논사록>에서도 여러 차례 외척의 정치참여 배제를 건의했다.
- 71)
『전서(全書)』권3, 진미재오책차(陳弭災五策箚)에서 옛날부터 외척에게 정사를 맡겨 좋은 정치가 이루어졌던 적이 없었다고 했다.
- 72)
同上.
- 73)
同上, 권7, 진시폐소.
- 74)
同上, 권4, 의진시폐소.
- 75)
陳時弊疎.
- 76)
<宣祖實錄> 권15, 선조 14년 5월 병술, 21책 p.377, “上曰 無乃久任有專擅招權之失乎.”
- 77)
陳時弊疎 壬午
- 78)
見註 30.
- 79)
『율곡전서』, 권25, 聖學輯要7, “爲政之事 以立紀綱爲先.”
- 80)
『全書』, 권25, 聖學輯要, “紀綱者 國家之元氣也”
- 81)
동상, 권3, 玉堂陳時弊疎, “紀綱者 國家之命脈也.”
- 82)
『全書』권3, 陳弭災五策箚, “國家之所以維持者 賴有紀綱 紀綱之所以整肅者 在於守法 有法不行 則紀綱必亂.”
- 83)
同上, 권15, 東湖問答, 論安民之術, “先革弊法 以救民生 欲革弊法 則當廣言路 以集善策 ···”
- 84)
『全書』, 권7, 辭大司諫兼陳洗滌東西疎, “人心之所同然者 謂之公論.”
- 85)
同上, 권7, 代白參贊仁傑疎, “公論者 有國家之元氣也.”
- 86)
同上, 권4, 玉堂論乙巳僞勳箚, “公論之發 出於國人 不可沮遏 則順輿情定國是.”
- 87)
同上, 권7, 代白參贊仁傑疎, “公論在於朝廷 則其國家治 公論在於閭巷 則其國家亂 若上下俱無公論 則其國家亡.”
- 88)
금장태, 栗谷의 時務論과 社會思想, 榴軒 李種厚博士 華甲紀念論文集, p.288.
- 89)
<전서> 陳時弊疎, “所謂浮議者 不知其所自來 始微漸盛 終至於動搖廟堂 波盪臺閣 則擧朝靡然 莫敢相抗 浮議之權 重於太山 銛於鋒刃 一觸其鋒 則公卿失其尊 賢俊失其名 儀秦無所用辯 賁育無所施其勇 終莫知其所以然也.”
- 90)
<전서> 辭大司諫兼陳洗滌東西疎, “臣聞 自古國家之所恃而維持者 士林也 士林者 有國之元氣也 士林盛而和 則其國治 士林激而分 則其國亂 士林敗而盡 其國亡.”
- 91)
<전서> 권3, 玉堂陳時弊疎, “心慕古道 身飾儒行 口談法言 以持公論者 謂之士林 士林在朝廷 施之事業 則國治 士林不在朝廷 付之空言 則國亂 ···”
- 92)
上揭 論文, p.289.
- 93)
<전서>권3, 陳弭災五策箚, “言路開塞 興亡所係.”
- 94)
정호는 <논십사차자>에서 정부조직, 토지측량과 식량분배, 지방통치, 관리선별방법, 병역문제, 식량저축정책, 자원보존계획 등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들은 경세택민의 중요한 사항들이다. 黃宗羲 宋元學案, 권14, 程灝편.
- 95)
<宣祖實錄>권7, 선조 6년 10월 乙未, 21책, p.274.
“上曰 凡開弊之事 又生一弊 誠未易爲.”
“上曰 我國之事 誠難爲也 欲改一弊 弊未能革 反添其害 可謂不能措手足矣.” - 96)
동상, 擬陳時弊疎.
- 97)
『全書』권5, 萬言封事, “夫所謂時宜者 隨時變通設法救民之謂也 程子論易曰 知時識勢 學易之大方也 又曰 隨時變易 乃常道也 蓋法因時制 時變則法不同.”
- 98)
『全書』聖學輯要7, “夫爲政而紀綱 如學者集義以生浩然之氣也 豈由一令之得正一事之合宜 而遠見其效哉”
- 99)
<孟子> 梁惠王 上篇 참조.
- 100)
同上, 권4, 擬陳時弊疎, “民依於食 國依於民 無食則無民 無民則無國.”
- 101)
<明宗實錄> 권30, 명종 19년 8월 甲午條 및 同書 권32, 명종 21년 4월 申未條.
- 102)
<全書> 권25, 聖學輯要7, 爲政第4 安民章.
- 103)
<全書> 권4, 擬陳時弊疎, “請自御膳御衣一切進貢之物 及闕中日用之需 皆三分減一.”
- 104)
同上.
- 105)
<全書> 권5, 萬言封事.
- 106)
黙明哲, 栗谷의 經世思想에 관한 試論, 韓國 儒學思想 論文 選集, p.473.
- 107)
<全書> 권15, 東湖問答, 論安民之術.
- 108)
<全書> 권15, 東湖問答, 論安民之術.
- 109)
<全書> 권5, 萬言封事, “悉除燕山所加定 以復祖宗之舊 因考列邑之物産有無 田結多少 民戶殘盛 推移量定 均平如一 必以本色 納于各司 則防納不禁自罷 民生多解倒懸矣 今日急務 無大於此矣.”
- 110)
李先敏, 李珥의 更張論, 韓國史論18, p.19. 참조.
- 111)
<全書> 권15, 東湖問答, 論安民之術.
- 112)
<全書> 권4, 擬陳時弊疎.
- 113)
<全書> 권7, 陳時弊疎.
- 114)
同上.
- 115)
<全書> 권15, 東湖問答, 論敎人之術.
- 116)
<全書> 권15, 東湖問答, 論東方道學不行.
- 117)
<全書> 권7, 陳時事疎 참조.
- 118)
<全書> 권5, 萬言封事.
- 119)
<全書> 권15, 東湖問答.
- 120)
<全書> 권5, 萬言封事.
- 121)
同上.
- 122)
同上.
- 123)
同上.
- 124)
同上.
- 125)
同上.
- 126)
<全書> 권3, 諫院陳時事疎.
- 127)
<全書> 권15, 東湖問答, 論安民之術.
- 128)
同上.
- 129)
<全書> 권5, 萬言封事.
- 130)
<全書> 권8, 六條啓.
- 131)
<全書> 권34, 附錄2, 年譜下, 癸未11年(선생 48세 때) ‘入對請豫養兵以備不慮’條.
- 132)
여기서 보수적이라고 한 것은 공천은 천한 신분을 면하게 하지만 사천은 그 주인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건의를 고려해볼 때 율곡이 노예를 재산의 일종으로 간주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133)
<全書> 권29, 經筵日記2, “養民爲先 敎民爲後 民生憔悴莫甚於今日 汲汲救弊先解倒懸 然後可行鄕約也.”
- 134)
<全書> 권15, 東湖問答.
- 135)
<全書> 권6, 應旨論事疎.
- 136)
<全書> 권15, 東湖問答, 論敎人之術.
- 137)
同上.
- 138)
<全書> 권6, 應旨論事疎.
- 139)
<全書> 권15, 東湖問答, 論敎人之術.
- 140)
同上.
- 141)
<全書> 권6, 應旨論事疎.
- 142)
<전서(全書)> 권6, <사대사간소(辭大司諫疎)>에서 율곡은 스스로를 경솔하고 거친 기질을 가졌으며 또한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배척을 받을 처지에 있다고 하였다.
- 143)
안재순(安在淳) 교수는 <율곡(栗谷)의 경세사상(經世思想)에 나타난 실학(實學)의 의미(意味)>(율곡사상연구(栗谷思想硏究) 제3집, 1997) p.319에서 율곡(栗谷)과 지봉(芝峯)의 경세론은 다같이 단편적인 책(策)으로 통일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하다고 한다.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사상사 유가경세사상편. 한국유가사상은 중국의 유가사상과 다른 독자적인 연구영역과 존재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한국유가경세사상은 한국 국민과 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 법률...자세히보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외부 저작권자가 제공한 콘텐츠는 네이버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이의 역사인식과 개혁사상 (한국사상사, 2002. 2. 28., 학문사)
'◈---친구 방(모셔온 글) > 자유게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세먼지 (0) | 2019.01.21 |
---|---|
타타르키비츠 미학사 (0) | 2017.08.21 |
인간의 역사와 사상의 발생 (0) | 2017.08.21 |
인간 (0) | 2017.08.20 |
로봇 시대 (0) | 2017.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