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 때의 문장가·실학자(1737~1805).
17강 燕巖 朴趾源의 實學思想
1) 생애와 학문 경향
연암 박지원은 조선 영조 13년(1737년)에서 순조 5년(1805년)에 활동 하였던 북학파 실학자로 妻叔인 李君文에게서 수학을 하고 洪大容에게 지구의 자전설을 비롯한 서구의 신학문을 익혔다. 1780년(정조 4)에 청조에 가서 利用厚生의 실생활을 보고 熱河日記로 그 기록을 남겼다. 그는 실학의 실현을 위하여 1786년 벼슬길에 나가 민생의 문제 해결에 힘쓰고 사회적 개혁과 정책의 불합리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의 실학적 태도는 利用이 있고서 厚生이 있으며 厚生이 있고서 正德이 있다고 하여 이용후생이 정덕보다 선행하여야 함을 주장하였다. 우주론에 있어서는 실증적 태도를 반영하여 만물의 생성은 모두 氣의 작용이라고 하여 理는 氣의 운동에 내재하는 법칙으로 보았다. 즉 물체가 형성이 될 때에는 반드시 質이 있게 되는데 이러한 質에 영원성을 부여하고 티끌이라는 미립자가 응취 결합하고 운동변화하는 과정에서 우주 만물이 생성된다고 하였다.
천명에 대하여는 의지를 내포한 목적론적 사유에서 벗어나 천을 단순히 자연법칙으로 파악하고 사물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다양한 현상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이로써 오행상생설을 배격하고 불교와 천주교가 현실생활을 허망하게 보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心性의 문제에 있어서는 객관적 실재론에 입각하여 心 性 物을 각각 종과 종소리 종치는 망치에 비유하여 감각의 근원은 물질이며 감각과 의식은 물질에 감각기관이 작용한 것이라고 설명을 하였다. 또한 기존의 도덕관념이 삼강오륜을 표방하면서 실상은 仁義의 巨盜라고 비난하면서 도덕평가의 기준을 민생에 유리한 실천 활동에서 구하여 참된 도덕은 민생에 있다고 하였다.
그의 개혁론은 이용이 있은 후에 생활을 풍족히 하고 인간의 도덕을 바르게 할 수 있다는 기본 입장에서 출발하여 田制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봉건적 신분제도의 철폐와 외국과의 통상 선진적인 기술의 도입 그리고 토지 소유는 일정한 한도 내에서 제한하여 점차 빈부의 격차를 감축하려는 限田論을 주장하였다. 당시의 민생고의 해결을 위하여 토지겸병을 제한하고자 하였다. 농민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위정자가 농업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농학을 연구하며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보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분제도에 관하여 적서의 차별이 악법임을 지적하였고 존명 사대주의를 배격하여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비록 오랑캐의 학문일지라도 선진 과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실학적 태도 때문에 신분질서의 개혁과 실용주의를 주장한 실학자로 평가를 받고 있다.
2) 社會改革論
홍대용의 사상에는 과학정신이 있다면 박지원에게 있어서는 문학을 통한 현실인식과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정신이 있다. 그는 소설을 통하여 당시 양반계층의 도덕적 위선을 풍자함으로써 신분계급에 사로잡힌 당시의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또 천하의 사람들이 勢를 따르고 名譽와 利益을 도모하면서 군자가 勢와 名譽와 利益을 말하는 것을 꺼리는 것은 그것을 독점하기 위한 心術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형식적인 도덕질서를 타파하는 사회 개혁정신을 가지고 양반의 생활양식을 무가치하거나 착취적인 것으로 비판함으로써 그 시대의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비판하였다. 이러한 현실 비판정신을 가지고 그는 당시의 통속적 관념체계와 신분적 권위의식의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전통의 권위에서 벗어나 관심을 과거적이거나 권위적인 것에서부터 현실적이고 미래적인 데로 돌려놓았으며 창조적인 개혁을 추구하였다.
3) 歷史意識
그는 44세에 燕行을 다녀오면서 청조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淸人과의 교류를 통하여 청조 사회에 대한 객관적 인식의 폭을 넓히게 되었다. 그는 熱河日記에서 조선인이 청조문물을 관찰하는 일반적인 태도를 반성하여 五妄을 들고 있다. 즉 자신의 문벌을 뽐내는 것 , 상투를 지닌 의관을 뽐내는 것, 거만하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 중국에 문장이 없다고 헐뜯는 것, 청조에 복속하는 漢人을 보고는 강개한 선비가 없다고 탄식하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만주족의 청조에 대한 저항감 때문에 그들을 경멸하려는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선입관에 사로잡힌 것으로 그들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지각을 스스로 막아버리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그는 청인과의 교류를 통하여 청조사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淸帝가 황벽한 燕河에 머무르는 일에서 몽고의 강함을 제어하려는 苦心을 살피고, 西番의 僧王을 黃金殿에 모셔다 스승을 삼고 있는 데서 西藏의 강함을 무마하려는 苦心을 살피고, 모든 문장에서 청제의 공덕과 은택을 적고 있는 사실에서 억압받는 漢人의 苦心을 살피고, 漢人이나 淸人이 모두 필담한 것을 없애는 행동을 통해 엄혹한 금법을 시행하는 苦心을 살피고, 사치품이나 골동품이 범람하는 데서 태평시대의 苦心을 살핀다고 하였다. 이것은 청조사회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청조의 관학이 주자학이라는 표면적 현상의 배경에는 청조가 한인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중국의 대세를 살펴서 재빨리 먼저 이를 차지하여 온 천하 사람의 입에 재갈을 물려 감히 자기들에게 오랑캐라는 이름을 씌우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간파하고 청조가 朱子를 높이는 효과로서 천하 사대부의 목덜미에 걸터타고는 그들의 목구멍을 조르면서 그 등을 어루만짐으로써 천하의 사대부들이 그 우롱과 위협에 휩쓸려서 구구하게 禮文이나 節目에 빠져들어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청조의 사상 탄압 방법은 焚書坑儒하는 것보다도 더 효과를 거둔 것이고 四庫全書의 방대한 편찬사업도 선비들로 하여금 머리가 희도록 붓을 쉴 사이가 없게 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당시 청조학술이 지닌 訓誥學 내지 考證學的 방법의 업적을 관심깊게 이해하기 보다는 관학인 주자학과 더불어 사상의 자유로운 비판정신을 억압하는 수단으로서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는 사실에서 그의 입장이 청조의 정치사회적 내지 역사적 현실 이해에 기울어져 있음을 엿볼 수 있으며 그것은 북학파의 의식 속에 깃들어 있는 復讐義理論的 요소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4) 實用精神
그는 연행을 하면서 압록강을 건너자 마자 민가의 외양간과 돼지우리에서 가름더미에 이르기까지 법도있게 정돈된 것을 통해서 利用의 실제를 발견하였다. 그는 연경을 다녀온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중국의 장관을 말하라고 하면 중국이 오랑캐의 땅이 되어 아무 볼 것이 없다 하는 것이 뜻이 높은 선비이고 그렇지 않으면 요동벌판 蘆溝橋 山海關 등 명승지를 장관이라고 일컫는 것이 통속적인 의견이다. 그러나 자신은 기와조각과 거름더미에도 장관을 볼 수 있다고 하여 청조의 利用을 높이고, 또한 천하를 위하는 자는 백성에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오랑캐에서 나온 법도일지라도 취하여 본받으려고 할 것임을 지적하여 이용의 법도를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변방 마을에서도 벽돌의 이용 방법뿐만 아니라 벽돌가마의 제도와 효율을 관찰하고, 아궁이와 굴뚝 구둘의 제도를 조사하면서 우리의 온돌 형태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여 개량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또한 수레의 제도를 본받을 것을 강조하면서 나라의 가장 큰 실용이 수레에 있다고 하였다. 그는 청조에서 활용되는 각종 수레의 형태와 서양 기계제도인 논에 물을 대는 龍尾車, 불을 끄는 水銃車, 방아를 찧는 牙輪, 가루 만드는 搖車, 등을 소개하면서 수레제도를 이용함으로써 재화를 유통시키고 부유하게 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용의 구체적인 문제로서 牧馬와 騎馬의 방법에서도 우리의 제도를 반성하고 청조제도를 수용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는 재화와 음식이 넉넉한 것이 교화의 원천이 되고 근본에 힘써 공을 일으키는 것이 백성을 양육하는 방법임을 확인하고 나라의 근본으로써 백성의 이익을 두텁게 하는 방법상의 문제로 天時 地利 人事를 經으로 하고 水利 土宜 農器를 緯로 하는 농업진흥책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이용후생의 방법을 연마하고 開物成務의 공적을 갖추게 하는 것에 목표를 두는 것이며 농업기술을 밝히고 상업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고 工匠의 혜택을 이루어 주는 실용의 개발을 선비의 과제로 삼고 있으며 이러한 실용이 곧 실학임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김민수 칼럼니스트, ssk0102 등록일: 2010-11-04오전 6:03:18 홍대용(洪大容)은 1765년(영조 41년) 홍억(洪檍)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군관(軍官)으로 수행, 3개월여를 북경에 묵으면서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을 만나 담론하며 경의(經義), 성리(性理), 역사, 풍속 등에 대하여 토론했다. 천문학·지리학·역사 등에 관한 지식을 쌓고 서양 문물을 배우고 돌아왔다. 천주당(天主堂)에서 서양 문물을 견학, 학습하고 독일 사람으로 청나라의 흠천감정(欽天監正)을 하는 할레르슈타인과 흠천감 부감(副監) 고가이슬을 만나 면담했으며, 청나라 관상대(觀象臺)를 여러 번 방문, 견학하여 천문지식을 습득해 오기도 했다. 별자리 투영장비·대형 천체망원경 등 설치
북학파의 선구자 홍대용(洪大容)
홍대용의 북경 방문은 당시의 여러 북학파 학자 중에서 제일 처음으로 실학의 도입에서 그 선구적 업적이 크다.귀국하여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론을 기록한 유포문답과 과학 사상을 담은 의산문답을 지었다. 지구(地球)의 자전설(自轉說)을 설파하였으며 토지 등을 균등하게 분할하는 균전제(均田制), 부병제(府兵制)를 토대로 하는 경제정책의 개혁을 주장했으며, 특히 실사구시 정신에 따라 신분 제도 개혁을 위해 과거제를 없애고 공거제(貢擧制)에 의한 인재를 고루 등용하며, 신분 등에 관계없이 8세 이상의 모든 아동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과감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충남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 홍대용 선생 생가지 일원에 홍대용 과학관이 건립된다.
시에 따르면 이 과학관은 생가 터 인근 야산 1만4204㎡에 건축면적 3248㎡에 전시실과 교육시설, 공용 시설 등을 갖춘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지어진다.
총사업비 200억원이 투입돼 임대형 민자사업(BTL)으로 추진되며, 2013년 12월 완공된다.
과학관은 홍대용주제관, 과학사전시관, 과학체험관 등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관으로 나눠 배치되며, 한국의 과학사와 홍대용 선생 관련시설, 기초과학에 대한 체험물이 전시된다.
또 천체(별자리) 투영장비와 투영시설을 설치하게 될 플라네타리움(Planetarium), 과학사와 기초과학 관련 영상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영상강의실과 수장고가 들어선다.
또한 지름 1m 크기의 대형 천체망원경이 설치돼 밤하늘 관측 등 천체교육에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천안시 관계자는 "과학관은 홍대용 선생의 생가지와 인접해 상징성이 뛰어나고 인근 관광자원과 연계가 쉽다"며 "특히 천문 관측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자연과학자와 사상가로 이름이 높았던 담헌 홍대용 선생(1731~1783)은 18세기 조선을 이끈 북학파의 거두로 과학사상서인 '의산문답'을 통해 지구(地球)의 자전설(自轉說)을 설파하였고 '주해수용(籌解需用)'이라는 수학서를 저술하는 등 사회와 과학사상가로서 당대의 뛰어난 학자였다.
"무릇 땅덩이는 하루에 스스로 한 바퀴를 도는데, 땅 둘레는 9만리이고 하루는 12시간이다. 9만리 넓은 둘레의 땅이 12시간에 도는데, 그 속도는 번개나 포탄보다도 더 빠른 셈이다. 땅이 이처럼 빠르게 돌기 때문에 허공의 기가 격하게 부딪치면서 허공에서 쌓여서 땅에 모이게 된다. 이리하여 상하의 세력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지면의 세력 즉, 땅이 끌어당기는 힘이다."
9만리는 실제 지구 둘레 약 4만㎞에 근접한 수치이며, 12시간도 자시·축시·인시 등 12지에 근거한 시간개념인 점을 감안하면 지금과 별 차이가 없다. 당시의 과학지식으론 역부족일 수밖에 없어 모호하긴 하지만 중력의 존재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개념은 지구가 그토록 엄청안 속도로 돌아가는데 왜 사람과 만물이 풍비박산하지 않으며 둥근 지구 표면에 붙어 있는 사람들이 왜 떨어져 나가지 않고 달과 별이 아래로 곤두박질하지 않는지 등으로 이어지는 <의산문답> 우주론과 세계인식론에 토대가 된다. 그것은 또한 우주무한설과 인간세상 가치들의 덧없음, 지구 및 인간중심주의 부정, 음양오행설 부정, 중화주의 세계관 부정으로도 나아간다.
코페르니쿠스(1473-1543)가 이미 지동설을 내놨고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던 때가 1616년이었으니, "애초 서양인은 땅이 둥글다는 것만 말하고 회전한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고 한 연암의 인식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함구령에 처해진 데서도 알 수 있듯 서양 역시 지동설이나 자전설은 매우 위험한 이단이었고 일반인들은 접하기도 어려운 불온사상이었다. 김석문(1658-1735)의 <역학도해>가 이미 덴마크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1546-1601)의 우주관을 싣고 지구가 1년에 366회전한다고 썼는데 담헌이 그것을 읽어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의산문답>은 비록 지구 공전 사실을 모르는 등 한계가 있었지만 자연과학 혁명을 거친 지금 봐도 충분히 통할 수 있는 자연관과 우주론를 펼쳐놓고 있으며, 그것을 토대로 한 세계인식, 사회인식은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을 만큼 파격적이며 시대를 훌쩍 앞서 있다.
성리학 부여잡은 기득권 비판
<의산문답>의 '의산'은 조선과 중국의 경계였던 만주 요녕성 북진현 서쪽의 '의무려산'을 가리킨다. 담헌은 35살이던 1766년 서장관이었던 숙부 홍억을 따라 연경(베이징)에 가서 60여일간 머물렀는데, 그때의 체험이 이 책의 집필동기가 됐거니와, 의산은 그 여행길에 거치게 되는 곳이고, 책 속의 주인공들인 '허자'가 '실옹'을 만나러 가서 '문답'을 벌인 곳이다. <의산문답>은 그 가공의 인물들이 자연·우주와 세상사에 대해 주고받은 문답집이다. 꿈이있는세상이 펴낸 <의산문답>은 여기에 이 고전 걸작을 오늘의 관점에서 어떻게 읽고 응용할 것인가를 고민한 출판사와 역자들의 문제의식을 강하게 녹여넣은 책이다. E.H. 카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명제를 모토로 삼은 이들은 <의산문답>이 현재의 우리사회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고 치유를 위한 시사점을 찾는데도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원서에는 없는 장·절 구분을 도입하고, 주를 붙이고, 지금 현실의 문제들과 당시를 대비하면서 문제의식을 환기하는 글들도 따로 덧붙였다.
지금의 문제와 대비하며 읽어볼만
이들이 보기에 이앙법과 대동법 등이 도입된 18세기 조선사회는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증대됐으나 그 열매는 기득권층이 독식하다시피했으며, 이런 부익부빈익빈의 양극화속에 수많은 난민·기민들이 발생하는 등 기존체제가 그에 따른 변화를 수용할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른 변혁의 시대였음에도 '허자'로 대표되는 당시 지배세력은 낡아빠진 기성이데올로기 성리학을 부여잡고 개혁을 완강히 거부했다. 이들은 실학파의 대변인격인 '실옹'의 입장에서 오늘날 한국사회가 바로 18세기 조선사회와 닮아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런 점에서 이미 250여년 전에 관과 곽으로 싸고 치장한 장례문화를 비판한 <의산문답>의 대목은 특히 흥미롭다.
이런 '과격한(?)' 사상의 소유자 담헌이 시대와 불화한 것은 당연했다. 비록 잘나간 조상 덕에 한때 말단 벼슬자리를 맡긴 했지만 그는 당시 지배계급들이 갔던 길을 사실상 거부했고 또한 배척당했다.
연암이 '홍덕보 묘지명'에서 "하하 웃고,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고 환호할 일"이라는 역설로 담헌의 죽음을 슬퍼한 것은 세속명리에 눈이 멀어 동아시아 당대 최고의 인재를 깔아뭉갠 그 시대와 지배계층에 대한 저주였으며, 담헌은 바로 연암 자신이기도 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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